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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룡사 응진전 석조십육나한좌상 일괄
- 지정종목 시도유형문화유산
- 지정(등록)일2007.08.31
- 시대
- 지역경북 문경시
김룡사 응진전에는 목조인 석가여래삼존불좌상(3구)을 중심으로 좌우에 석조인 나한상(羅漢像 16구)과 제석천(帝釋天 2구), 사자(使者 2구), 동자(童子 1구)를 포함한 24구의 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가운데 제작시기와 조각승이 밝혀지지 않은 석가여래삼존불좌상과 동자상을 제외한 20구가 ‘문경 김룡사 응진전 석조십육나한좌상 일괄’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응진전 나한상들은 모두 가부좌를 튼 모습을 하고 있으며, 대부분은 양 손을 무릎 위에 올린 자세를 취하지만, 염주나 죽비를 쥐고 있어 수행자의 모습이 부각된 나한상들도 있다. 그리고 해태를 가사 속에 두거나, 봉황 목을 움켜잡아 마치 서수(瑞獸)들을 애완동물처럼 다루는 모습이 형상화되기도 한다. 나한상들 아래에는 보관을 쓰고 홀(笏)을 쥔 제석천 2구와 두건을 쓰고 두루마리를 한손에 들고 있는 사자2구가 있다. 이상의 16나한상 및 권속들은 주존을 비롯한 석가삼존불과 모든 부분에서 현격한 형태적 차이점이 있다. 나한상 등에는 조각승 수연(守衍)의 스승인 승호파(勝湖派) 양식에 기반한 17세기 말 ~ 18세기 초 경상북도일대의 조각 양식이 잘 드러나 있다. 즉 둥글 넓적한 얼굴에 두툼하게 늘어진 귓불 형태,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린 자세 그리고 염주나 봉황을 안고 있는 점 등이다. 이는 김룡사 대웅전 석가모니불좌상의 복장에서 출토된 발원문에 의해서도 확인되는데, 응진전 불상의 조성시기는 1709년이며 조각승 수연 등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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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비봉리 패총
- 지정종목 사적
- 지정(등록)일2007.08.28
- 시대
- 지역경남 창녕군
창녕비봉리패총은 내륙지방에서 발견된 최초의 신석기시대 패총 유적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시대의 배와 신석기시대 편물기술을 보여주는 망태기를 비롯하여 대규모 도토리 저장시설 등이 출토되어 신석기시대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확인되었다. 배수장 건립 과정에서 발견되어 현재 배수장은 전시관으로 리모델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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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북한산서암사지
- 지정종목 시도문화유산자료
- 지정(등록)일2007.08.13
- 시대
- 지역경기도 고양시
북한산성 수구문지 주변에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거듭된 외침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도성 외곽방어를 위해 천연의 요새인 북한산에 산성을 축성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거듭된 논의 속에 1711년(숙종37) 북한산성 축성을 결정하여 그해 4월부터 9월까지 공사가 진행되었다. 축성공사는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등 삼군문의 병사들이 주도적으로 추진했지만, 이외에도 전국 사찰의 많은 승려가 동원되었다. 축성 후 산성 방어와 관리를 위해 성내에 승군이 주둔할 수 있는 11개의 사찰이 건립되었다. 이들 사찰에는 군사관련 시설과 함께 승장 11인, 수승 11인, 의승 350인 등을 두었다. 승려들은 각도의 승려들 중에서 차출하여 2개월씩 교대로 산성방어를 담당하였다. 서암사의 승려들은 가까이 있는 수문 일대의 방어를 주로 담당했다. 이러한 역할은 1894년 승군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약 200여 년간 지속되었다. 일제강점기까지 남아있었던 서암사는 1925년 대홍수 때 매몰되어 폐사 되었다고 한다. 발굴 조사 결과 만 여평의 절터에는 대웅전과 산신각, 세심루, 군기고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조선시대의 수파문 기와편과 청화백자편, 명문기와, 백자편 등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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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봉안리 은행나무
- 지정종목 천연기념물
- 지정(등록)일2007.08.09
- 시대
- 지역전남 담양군
술지마을 중앙에 있는 이 은행나무는 마을 외곽 네 방위에 있는 느티나무와 함께 마을을 지키는 나무로 흔치 않게 마을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규모에서도 가슴높이 둘레가 8m로서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다른 은행나무에 비하여 손색이 없이 크고 웅장하다. 나라의 중대사에 이 나무가 울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생활이 어려운 시기에도 도둑이 없는 등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당산나무로 기려오면서, 휴식공간은 물론 수확한 열매는 마을 공동사업에 사용하는 등 학술적 대표성과 함께 향토 문화적 가치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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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전일리 팽나무 숲
- 지정종목 천연기념물
- 지정(등록)일2007.08.09
- 시대
- 지역전남 보성군
거센 바닷바람 등을 막고 마을을 비보(裨補; 도와서 모자람을 채움)하기 위하여 조성된 남해안 지역의 마을숲 형태를 보여주는 사례로, 마을의 영광 정(丁)씨 종택 앞에 위치하며 대대로 마을사람들과 애환을 같이해온 숲이다. 수령은 200~400년 정도 되며, 155m 길이의 둑에 한 줄로 자라고 있는 이 나무들은 키가 9~15m 정도 된다. 구성하는 각 나무의 규모가 크고 모양이 아름다우며 생육상태 또한 노거수답지 않게 대부분 양호하게 잘 보존되어 있으며 주변의 지형과 산세에 이 숲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어내고 있다. 임진왜란 때 충무공(이순신) 막하에서 공을 세운 정경명이 충무공과의 만남을 기념하여 심은 것이라는 유래가 있으며 잎의 무성함에 따라 풍년과 흉년을 예감하며 매년 당산제를 지내왔던 당산림으로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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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백족사 석조여래좌상
- 지정종목 시도문화유산자료
- 지정(등록)일2007.08.03
- 시대
- 지역충북 청주시
백족사는 가덕면 백족산(白足山)중턱 남쪽 기슭에 있는 사찰이다. 창건시기나 연혁을 알려주는 문헌기록은 없으나 경내에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석탑의 부재와 조선시대의 석비의 옥개석 등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창건은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본래 백족사는 “尋眞庵”이라는 암자였다가 이 산 이름에 따라 절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石造如來坐像은 白足寺 大雄殿 내에 主尊으로 봉안되어 있는 불상으로서 結跏趺坐하고 正面直視하고 있는 모습으로 비교적 균형이 잡힌 단정한 佛像이다. 최근에 불상에 입혀진 백회를 벗겨내고 불단의 일부를 개조하여 蓮花臺座의 모습도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목이 절단되어 시멘트로 붙여 보강하였는데, 접합부분에 시멘트를 두껍게 덧칠하여 많이 부어올랐고 눈과 입도 근래에 갈아내어 보수함으로써 약간 변형되었다. 양쪽의 귀도 매우 짧아져서 어색한 느낌이다. 머리는 螺髮이며 정수리에는 肉髻가 표현되었고 相好는 전체적으로 圓滿하다. 목에는 삼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시멘트로 보수하여 보이지 않고, 어깨와 무릎 등 아래로 갈수록 폭이 넓어지고 있다. 法衣는 右肩偏袒으로 입었으며 옷주름이 비교적 유려하게 표현되어 오른쪽 팔과 무릎 전체를 덮고 있다. 手印은 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臺座는 석질이 불상과 달라서 입자가 거칠며, 넓은 판석을 지대석으로 삼았으나 원래의 것은 아니다. 하대석과 상대석은 각각 伏蓮花紋과 仰蓮花紋이 상하 대칭적으로 조각되었고 중대석은 八角柱形으로 문양의 조식은 없다. 불상높이 86cm, 좌대높이 94cm, 머리높이 29cm, 무릎넓이 69cm이다. 광배는 없으나 연화대석과 불상의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 석불좌상으로서 세련되고 정교한 조각기법은 볼 수 없으나 흔치 않은 예이다. 전체적으로 조각수법이 세련되거나 정교하지 못하고 목과 안면부에 파손이 있으나 불상의 원래 모습은 대체로 잘 남아 있는 편이다. 또한 하대석·중대석·상대석으로 이루어진 연화대좌(蓮花臺座)도 원형대로 남아 있어 백족사 자리에 있었던 고려시대의 절터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충북지역에서는 그리 흔치 않은 불상으로 학술적 가치가 크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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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쌍산 항일의병 유적
- 지정종목 사적
- 지정(등록)일2007.08.03
- 시대
- 지역전남 화순군
한말 의병활동이 한창일 때 전라남도 화순군 계당산 일대를 중심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운 전남 의병활동의 거점 가운데 하나이다. 예로부터 계당산 일대는 쌍산, 쌍봉 또는 쌍치라 불리었는데, 이것에서 유래하여 ‘쌍산의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907년 양회일, 임노복, 임상영, 안찬재 등이 주축이 되어 쌍산에서 의병을 일으킨 다음 능주, 동복, 화순 일대로 퍼져 의병활동을 벌였다. 이백래가 주축이 되어 호남창의소에서 펼친 의병활동과 안규홍 부대가 봉기하여 펼친 의병활동 또한 쌍산의소를 중심으로 전개된 의병활동의 일환이다. 쌍산의소에는 무기 및 탄약을 공급하는 무기 제작소와 유황의 저장고인 유황굴, 의병 방어시설인 의병성(義兵城)의 흔적이 남아 있어, 대규모의 의병들이 주둔하여 스스로 무기를 만들어가며 일본군에 대항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기 제작소에는 축대 위에 철을 녹이는 용광로의 벽체와 쇠부스러기들이 흩어져 있다. 이곳에서 약 4㎞ 정도 떨어진 전라남도 보성군 복내면 화정동에 있는 철광산의 철광석을 운반하여 무기를 만들었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의병성은 높이 약 80㎝ 정도의 돌들이 돌담 모양으로 길게 쌓여 있으며, 그 내부에는 원형 또는 사각의 낮은 돌담들이 불규칙하게 늘어선 막사터가 모여 있다. 의병성과 막사터로 보아 이곳이 쌍산의병의 진지였음을 알 수 있다. 쌍산의소는 구한말 의병들이 왜경에 대항하여 전투를 준비하던 창의소(創義所) 터로 당시 호남의병 뿐만 아니라 한말 의병사에 빛나는 문화유적으로 의병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유적지이다. ※(쌍산의소 → 화순 쌍산 항일의병 유적)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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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현 관아
- 지정종목 사적
- 지정(등록)일2007.07.31
- 시대
- 지역경남 거제시
거제현의 관아는 배산구조와 안산, 관아 배치와 진입로 구조가 시각적으로 뚜렷한 축을 형성하여 한양의 광화문-경복궁-백악산의 축과 매우 흡사한 시각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 곳이다. 현존하는 관아 건물인 기성관은 거제현의 객사로 중심적 역할을 하던 곳으로 단청이 화려하고 웅대한 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비록 동헌 건물이 헐리고 그 자리에 면사무소가 들어서 있지만 부속 건물이었던 질청이 남아있고 당시 고지도 등의 관련 자료가 많아 당시 읍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는 유적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거제 읍치의 관아와 거리는 조선후기 읍치의 전형적 경관과 구조를 보여줄 뿐 아니라 주요건물인 객사와 부속건물이 남아 있어 역사적·경관적으로 보존가치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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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군 관아와 향교
- 지정종목 사적
- 지정(등록)일2007.07.31
- 시대조선시대
- 지역전북 김제시
김제는 삼국시대 때부터 벼농사가 발달한 지역으로, 농업이 산업의 근간을 이루던 전근대 사회 동안 풍요를 누리던 지역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 동안 중요한 정치세력이 배출되지 않았음에도 군(郡)으로써 읍의 격이 비교적 높은 지역이었으며, 현존하는 관아 건물과 향교 건물들이 그에 따른 위계를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있다 김제 관아는 조선시대 당시의 건물(동헌, 내아, 피금각, 관리사로 부르는 건물 1채)이 다수 남아 있고. 향교는 대성전이 조선시대 건물이고, 명륜당과 문루인 만화루 등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에 다시 지은 것들이나 관아 및 향교 건축의 품격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만큼 잘 보존되어 있어서, 관아와 향교를 중심으로 지방 통치와 교화 기능을 담당하던 우리나라 읍치(邑治)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관아 및 향교가 인접한 거리(관아의 동헌과 향교 사이의 거리 약 130m)에 함께 보존되고 있어 조선시대 행정기관과 교육기관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고, 관아의 동헌과 내아가 함께 남아 있는 매우 드문 예라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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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목 관아와 향교
- 지정종목 사적
- 지정(등록)일2007.07.31
- 시대조선시대
- 지역전남 나주시
나주는 삼국시대 때부터 농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농업이 산업의 근간을 이루던 전근대 사회 동안 풍요를 누리던 지역이었고, 고려왕조부터 조선왕조까지 약 1,000년 동안 목(牧)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한 전라도의 대표적 큰 읍치이었으며, 현존하는 관아 건물과 향교 건물들이 그에 상당한 권위를 보여주고 있어 상당한 가치가 있다. 나주 관아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성읍지, 여지도, 나주목지도를 비롯한 고지도 등에서 위치와 건물 구성을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으며. 객사 등의 발굴 성과와 옛 사료들을 토대로 조선시대 지방통치 중심지의 구조를 파악하고자 할 때, 현존하는 관아 건물이 좌표축의 구실을 하는 중요한 가치가 있다. 나주 향교는 평지에 들어선 전묘후학의 배치형태를 띠고 있는 전형적인 예이며, 특히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대성전은 그 규모가 대단히 웅장할 뿐 아니라 양식, 격식이 뛰어나 조선후기 향교건축을 대표할 수 있어 건축학적 가치가 크다. 또한 나주향교는 조선시대 교육시설의 규모를 따지면 성균관 다음이라고까지 지칭될 정도로 규모가 클 뿐 아니라 교육과 제사의 고유기능을 간직하고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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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홍산현 관아
- 지정종목 사적
- 지정(등록)일2007.07.31
- 시대
- 지역충남 부여군
홍산현 관아는 비홍산 끝자락의 완만한 경사지에 입지하고 있는 조선시대의 관아이다. 관아의 핵심시설인 객사와 동헌이 비교적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서 조선시대 관아의 규모와 형태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객사는 남향, 동헌은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내아영역의 발굴조사를 통해 북측 경계의 담장렬이 확인되어 전체적인 내아영역의 규모를 일부 파악하였으나 추가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전체 영역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다. 홍산현 관아와 관련된 중요 기록은 여지도서(1757~1765), 홍산읍지(영조이후), 호서읍지(1892~1895), 서울대 규장각 소장 홍산현지도를 들 수 있다. ※(홍산현관아 → 부여 홍산현 관아)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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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심원사 석조유물
- 지정종목 시도문화유산자료
- 지정(등록)일2007.07.30
- 시대
- 지역경북 성주군
성주 심원사 석조유물은 중창공사의 진행 중에 발견 또는 발굴된 신라후기에 창건된 사찰인 심원사의 사지(寺址)에 남아 있던 여러 종류의 불교유물들로서, 석조불상대좌(石造佛像臺座), 배례석(拜禮石), 불상광배(佛像光背),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遮那佛坐像), 신방석(信枋石), 석탑기단갑석(石塔基壇甲石) 등이다. 석조유물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높이 47㎝, 어깨폭 40.5㎝, 최대폭 43.5㎝, 불상광배가 136.5×110㎝, 석조불상대좌가 73.2×17.4㎝, 석탑기단갑석이 101.8×102.2㎝, 신방석이 지름 74㎝, 높이 16.8㎝의 규모로 되어 있다. 심원사는 창건연대가 8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사찰로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이 그의 시에서 ‘고사(古寺)’라 칭한 것으로 보아 오랜 역사 동안 번창한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중종 때의 승려 지원(智遠)이 중수하였고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중창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정조 23년(1799)에 편찬된 ꡔ범우고(梵宇攷)ꡕ에는 폐사(廢寺)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18세기에는 폐사가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석조유물은 통일신라~고려 초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불상광배는 두광과 신광을 갖춘 주형광배(舟形光背)로 전체적으로 우수하다고 하겠으며, 향로 2좌를 배치한 예는 극히 드문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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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성혈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 지정종목 시도유형문화유산
- 지정(등록)일2007.07.30
- 시대
- 지역경북 영주시
성혈사 나한전 내에 봉안되어 있는 이 불상은 *지권인(智拳印)을 맺고 연화좌에 결가부좌로 앉은 비로자나불상이다. 경직되고 형식화된 경향은 있으나 무릎에서 엉덩이로 이어지는 윤곽선이 비교적 자연스럽고 옷주름의 단면도 곡선으로 처리하는 등의 특징은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전반 사이의 양식이다. 불단에 가려서 세부를 확인하기 어려우나 대좌는 3단의 연화좌로서 불상 조성 당시의 것으로 추정된다. 양손은 파손되어 보수하였고 양무릎의 끝부분이 떨어져 나간 상태이다. *지권인(智拳印) : 두 손 모두 엄지손가락을 손안에 넣고 주먹을 쥔 다음, 왼손의 집게손가락을 펴서 오른손으로 감싸쥐고, 오른손의 엄지손가락과 왼손의 집게손가락 끝을 서로 맞대는 손 모양. 오른손은 부처를, 왼손은 중생을 상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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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계사 목조아미타불 좌상
- 지정종목 시도유형문화유산
- 지정(등록)일2007.07.25
- 시대2년
- 지역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제주 한림읍 월계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은 불복장에서 발견된 발원문에 의해 1661년이라는 조성연대와 운혜와 상전이 조각한 불상으로 17세기 불상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등 국가유산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1671년 조선후기의 조각장인 응혜·계찬스님에 의해 아미타삼존불의 협시보살로 조성된 삼광사 목조불상은 17세기 불상연구의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며, 용문사 불상의 경우 시주자와 조성자가 밝혀져 조선후기 불상양식을 고찰할 수 있는 중요한 국가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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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선국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 지정종목 보물
- 지정(등록)일2007.07.13
- 시대
- 지역전북 김제시
선국사 건칠아미타불좌상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유행한 건칠기법으로 조성된 상으로, 체구가 장대하고 각 부의 비례가 균형감 있게 느껴진다. 상호(相好)는 원만하고 머리는 나발(螺髮)이며 정상계주(頂上髻珠)와 중앙계주(中央髻珠)가 있다. 어깨가 둥글고 가슴부분이 융기되어 있으며 측면 역시 두터워 풍부한 양감이 느껴진다. 착의형식이나 가사의 금구장식, 내의를 묶은 매듭의 표현 등 양식적으로 “장곡사 금동 약사여래좌상”(보물, 1346년 제작) 및 지금은 망실된 “문수사 금동여래좌상”(충남도유형문화유산, 1346년)과 같은 고려후기 14세기 전반 불상들과 공통된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둥근 얼굴이나 왼쪽 어깨에서 접혀져서 늘어진 옷자락 모습은 1274년에 중수하고 1322년에 개금을 한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1274년 중수, 1322년 개금) 및 “화성 봉림사 목아미타불좌상”(보물, 1362년 하한)과도 비교가 된다. 재료가 건칠이라는 점은 이 상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현존하는 건칠상은 그 수가 많지 않으며 대부분이 보살상이다. 따라서, 이 아미타불좌상은 14세기 중반의 조각양식을 잘 보여준다는 점 그리고 드문 고려시대 건칠여래상이란 점에서 보물로 지정할만한 가치가 있다 하겠다. 선국사 건칠아미타불좌상에서는 복장물이 발견되었는데, 일부가 유실되고 현재는 14세기말에서 15세기말의 자료들만이 남아있다. 현존하는 인본다라니는 회화적인 도상이 나니라 범자(梵字)를 원상(圓相)으로 배치한 관념화된 도상이란 점에서 불교사상과 관련하여 인쇄사 및 서지학 분야에서 중요한 자료이므로 불상과 함께 일괄로 지정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