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중국의 사신을 맞아들이던 모화관 앞에 세웠던 주춧돌이다.
개화기에 우리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다짐하는 의미로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면서 그 기둥을 받치던 밑돌인 주초만 남게 되었다. 모화관은 조선 태종 7년(1407)에 처음 세우고 모화루라 하였는데 그 뒤 세종 12년(1430)에 모화관이라 이름을 바꾸고 그 앞에 상징적인 의미의 홍살문을 세웠다. 중종 32년(1537)에 홍살문보다 격식을 갖춘 형식의 문을 만들고 ‘영조문’이라 하였다가 중종 34년(1539)에는 중국 사신의 건의로 영은문이라 이름을 고쳤으며, 연주문·연은문이라고도 하였다.
중종 때 만들어진 문은 1칸 규모이며 두 개의 긴 주춧돌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우진각지붕을 얹었는데, 지붕은 청기와로 덮고 각종 동물 모양을 조각한 잡상을 배치하였다. 남아 있는 2개의 주초는 2단의 사각형 받침돌 위에 기둥처럼 길게 세워져 있다. 위에 놓인 받침돌에는 2개씩의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다. 1896년 독립문이 세워지면서 주초만 그 앞에 세워두었는데, 1979년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독립문과 함께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영은문주초 → 서울 영은문 주초)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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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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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등록일)
1963.01.21
서울 영은문 주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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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종목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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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면적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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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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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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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연대/시대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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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자(소유단체)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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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관리단체)
서대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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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분류
유적건조물 /인물사건 /역사사건
국가유산 설명
연혁
| 구분 | 내용 | 비고 |
|---|---|---|
| 1537 (조선 중종 32년) | 조선시대에 중국의 사신을 맞아들이던 모화관 앞에 있었던 세웠던 주춧돌로 영은문은 중종 32년(1537)에 홍살문보다 격식을 갖춘 형식의 문을 만들고 '영조문'이라 함 | |
| 1539 (조선 중종 34년) | 중국 사진의 건의로 영조문에서 영은문으로 명칭 변경 | |
| 1963 | 고적 제59호를 사적 제33호로 재지정(문교부고시 제174호) | |
| 1979 | 1896년 독립문 건립으로 인하여 주초만 남아있었는데, 1979년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독립문과 함께 지금의 자리로 이건 | |
| 2008 | 문화재구역 조정고시 | |
| 2010 | 현상변경허용기준 고시 | |
| 2011 | 문화재명 변경(영은문주초→서울 영은문 주초) | |
| 2019 | 보존처리 |
사업 이력 6건
| 사업유형 | 사업명 | 연도 | 사업주체 | 사업수행 | 상세보기 |
|---|---|---|---|---|---|
| 기타 | 1976년 문화재대관 사적편(하) | 1976 | 문화재관리국 | 문화재관리국 | |
| 조사연구 | 2017년 사적정기조사 | 2017 | 문화재청 보존정책과 | 사단법인 우리문화유산연구원 | |
| 조사연구 | 2020년 사적정기조사 | 2020 | 문화재청 보존정책과 | 사단법인 호연건축문화유산연구원 | |
| DB 구축 | 2021년 문화유산 원형기록 통합DB 구축 | 2021 | 문화재청 정보화담당관 | 엔디에스컨소시엄 | |
| DB 구축 | 2022년 문화유산 원형기록 통합DB 구축 | 2022 | 문화재청 정보화담당관 | 엔디에스컨소시엄 | |
| DB 구축 | 2024년 국가유산 원형기록 통합DB 구축 사업 | 2024 | 문화재청 디지털문화유산팀 | 엔디에스컨소시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