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속기록물 상세

강릉 오죽헌 - 평면도

강릉 오죽헌.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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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규격(mm) 테두리 바탕색 글자색 문양
가로 세로
현판(S01) 815 (735) 500 (420) 흑색 백색 화문
현판(S02) 1130 368 백색 흑색 -
현판(S03) 1,420 (1,360) 390 (330) 흑색 백색 화문
현판(S04) 900 (820) 490 (410) 흑색 백색 화문
현판(S05) 1,265 (1,165) 460 (360) 흑색 백색 화문
현판(S06) 1,335 (1,255) 465 (385) 흑색 백색 화문
현판(S07) 1,740 (1,600) 790 (710) (570) 흑색 백색 화문
현판(S08) 1,470 (1,370) (1,250) 625 (415) (295) 흑색 백색 화문
현판(S09) 1,140 (1,000) (920) 520 (420) (340) 흑색 백색 화문
현판(S10) 635 (575) 400 (340) 흑색 백색 -
현판(S11) 965 (915) 455 (405) 흑색 백색 -
현판(S12) 1095 640 흑색 백색 -
현판(S13) 840 (760) 410 (330) 흑색 백색 화문
현판(S14) 1,280 (1,150) (1,030) 595 (445) (325) 흑색 백색 화문
현판(S15) 485 (445) 320 (280) 흑색 백색 -
현판(S16) 640 (600) 360 (320) 흑색 백색 -
현판(S17) 1520 385 흑색 백색 -
현판(S18) 580 275 흑색 백색 -
현판(S19) 1,105 (1,045) 360 (300) 흑색 백색 -
현판(S20) 620 (560) 400 (340) 흑색 백색 화문
현판(S21) 630 (570) 410 (350) 흑색 백색 화문
현판(S22) 600 (540) 400 (340) 흑색 백색 화문
현판(S23) 560 (500) 405 (345) 흑색 백색 화문

현판(S01)

현판(S01
  • 원문夢龍室
  • 국문몽룡실(夢龍室)
  • 번역몽룡실(夢龍室)
  • 역주꿈에 용을 본 방

현판(S02)

현판(S02
  • 원문烏竹軒
  • 국문오죽헌(烏竹軒)
  • 번역오죽헌(烏竹軒)
  • 역주검은 대나무가 있는 집

현판(S03)

현판(S03
  • 원문烏竹軒 吾廬雖小亦容身。 爲築維垣間四隣。 遠近碧山千古畵。 風霜烏竹一軒珎。 黃花自笑年年嫩。 白髮雖催日日新。 莫惜顧之成醉臥。 人間何處有眞人。 我與丹靑寺幻身。 何▨▨▨笑東隣。 桑田白日孤輪▨。 槐國金單一券珎。 元亮纔舂黃菊餐。 季烏極好玉尊新。 閑▨宮▨光具▨1。 莫囊▨▨1遠示人 次 高臥江1村老此身。 一軒風味竹爲隣。 碁無敵手名仍貴。 瓮1有香醪醉是珎。 興到涉園添散逸。 閑來得向寫綾1新。 憑君欲問幽居趣。 愧我紅塵汨沒人。 監司 柳灌。 次 辦得江湖未死身。 一軒烏竹萬夫隣。 家徒此物貧爲寶。 識止於君懶是珎。 碁局穩隨淸影轉。 酒罇和送細香新。 韓公錯有祭冥論。 殊異1蘇仙俗了人。 竹軒主人。奕如▨秋1。 飮過于伶。全二人之興1於一身。▨▨受1此君。視▨▨▨▨有20)遠矣。▨▨2四韻詩。求和甚▨2。殘▨▨▨2。▨2。竹有▨2。▨▨▨漠2識。老杜▨2有風次▨▨▨▨向2。於六及之。▨▨具2亦有▨▨斯30)乎。 ▨▨…▨▨3
  • 국문오죽헌 이사온(李思溫)3 내 집 비록 작아도 몸 눕힐 만한데, 사방 이웃과 사이에는 쌓은 담장뿐. 원근의 푸른 산은 천고의 그림 같고, 풍상 견딘 오죽은 이 집의 보배일세. 황국화 홀로 웃어도 해마다 어여쁘고, 백발 비록 막아본들 날마다 새롭구나. 살림 축나도록 술 마신다 아까워 말게. 인간세계 어디 따로 신선이 있다던가. 나나 단청이나 꾸미면 매한가지로 변할 수 있으니3 붉은 분칠에 모름지기 어찌 동쪽 마을 추녀를 비웃으리오.3 해 뜨는 동해3에 밝은 태양이 이제 바퀴통같이 둥그니, 괴안국(槐安國)3의 금빛 문장도 한바탕 꿈속의 보배인 것을. 원량(元亮)3 도연명은 늦도록 황국화의 향기를 찾았고, 계응(季應)3은 끝까지 옥 같은 향초의 청신함을 즐겼네. 단약 굽는 비법에 대해 틈틈이 엿본 것이 있다면 주머니 속에 귀히 숨기지 말고 멀리 남들에게도 보여주시게. 차운하다 편히 누워 늙도록 강촌에서 은거하니, 멋스러운 이 집엔 대나무가 이웃일세. 적수 없는 바둑 솜씨에 이름값 귀하고, 옹기의 술 향기로워 취해도 보배롭지. 흥겨워 동산 거니니 한가로움 더하고, 여유롭게 시구 얻어 청신함을 그리네. 그대에게 기대 은자의 멋 물어보려니, 세속에 골몰해 온 내가 부끄러워지네. 강원감사(江原監司) 유관(柳灌, 1484-1543차운하다 신광한(申光漢 1484-15540) 강호의 땅을 마련해 그럭저럭 살아온 덕에, 하나의 오죽헌에 일만 명을 이웃하게 됐네.4 집엔 다만 이것4만 있으니 가난함도 보배가 되고, 아는 건 그대4 관한 것뿐이니 게으름도 진귀하네. 바둑판엔 옮겨가는 맑은 대 그림자 조용히 비치고, 술동이엔 새로 익은 은은한 향기 부드럽게 나건만, 한유는 혼명(昏冥)4의 술 세상에 대해 오해했으니, 빼어난 소선(蘇仙)4조차 세속인으로 만들어 버리겠네. 오죽헌의 주인4은 혁추(奕秋) 혁추(奕秋)는4보다도 바둑을 잘 두었고, 유영(劉伶)4보다도 술을 잘 마셨다. 혁추와 유영의 즐거움을 한 몸에 온전히 갖추었으면서도 또한 대나무[此君]4까지 사랑할 줄 알았기에 세상에 악착스러운 자들과 비교하면 크게 달랐다. 일찍이 네 개의 운자(韻字)를 둔 시를 두었는데, 내게 차운하는 시를 간절하게 요구해 와서 장남 삼아 시를 지어서 돌려보낸다. 아! 대나무에도 향기가 있음을 세속에서는 아는 사람이 없다. 오직 두보만이 늘그막에 “바람은 은은한 향기 실어 보내네[風吹細細香]”라는 구절을 홀로 지었다.50) 이 여섯 가지5에 대해 언급하자면 오죽헌의 주인 역시 아마도 이에 대해 얻은 경지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 번역오죽헌 이사온(李思溫)3 내 집 비록 작아도 몸 눕힐 만한데, 사방 이웃과 사이에는 쌓은 담장뿐. 원근의 푸른 산은 천고의 그림 같고, 풍상 견딘 오죽은 이 집의 보배일세. 황국화 홀로 웃어도 해마다 어여쁘고, 백발 비록 막아본들 날마다 새롭구나. 살림 축나도록 술 마신다 아까워 말게. 인간세계 어디 따로 신선이 있다던가. 나나 단청이나 꾸미면 매한가지로 변할 수 있으니3 붉은 분칠에 모름지기 어찌 동쪽 마을 추녀를 비웃으리오.3 해 뜨는 동해3에 밝은 태양이 이제 바퀴통같이 둥그니, 괴안국(槐安國)3의 금빛 문장도 한바탕 꿈속의 보배인 것을. 원량(元亮)3 도연명은 늦도록 황국화의 향기를 찾았고, 계응(季應)3은 끝까지 옥 같은 향초의 청신함을 즐겼네. 단약 굽는 비법에 대해 틈틈이 엿본 것이 있다면 주머니 속에 귀히 숨기지 말고 멀리 남들에게도 보여주시게. 차운하다 편히 누워 늙도록 강촌에서 은거하니, 멋스러운 이 집엔 대나무가 이웃일세. 적수 없는 바둑 솜씨에 이름값 귀하고, 옹기의 술 향기로워 취해도 보배롭지. 흥겨워 동산 거니니 한가로움 더하고, 여유롭게 시구 얻어 청신함을 그리네. 그대에게 기대 은자의 멋 물어보려니, 세속에 골몰해 온 내가 부끄러워지네. 강원감사(江原監司) 유관(柳灌, 1484-1543차운하다 신광한(申光漢 1484-15540) 강호의 땅을 마련해 그럭저럭 살아온 덕에, 하나의 오죽헌에 일만 명을 이웃하게 됐네.4 집엔 다만 이것4만 있으니 가난함도 보배가 되고, 아는 건 그대4 관한 것뿐이니 게으름도 진귀하네. 바둑판엔 옮겨가는 맑은 대 그림자 조용히 비치고, 술동이엔 새로 익은 은은한 향기 부드럽게 나건만, 한유는 혼명(昏冥)4의 술 세상에 대해 오해했으니, 빼어난 소선(蘇仙)4조차 세속인으로 만들어 버리겠네. 오죽헌의 주인4은 혁추(奕秋) 혁추(奕秋)는4보다도 바둑을 잘 두었고, 유영(劉伶)4보다도 술을 잘 마셨다. 혁추와 유영의 즐거움을 한 몸에 온전히 갖추었으면서도 또한 대나무[此君]4까지 사랑할 줄 알았기에 세상에 악착스러운 자들과 비교하면 크게 달랐다. 일찍이 네 개의 운자(韻字)를 둔 시를 두었는데, 내게 차운하는 시를 간절하게 요구해 와서 장남 삼아 시를 지어서 돌려보낸다. 아! 대나무에도 향기가 있음을 세속에서는 아는 사람이 없다. 오직 두보만이 늘그막에 “바람은 은은한 향기 실어 보내네[風吹細細香]”라는 구절을 홀로 지었다.50) 이 여섯 가지5에 대해 언급하자면 오죽헌의 주인 역시 아마도 이에 대해 얻은 경지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 역주顧之 : 1830년에 간행된 『관동지(關東誌)』에는 ‘傾家’로 되어 있어 번역문에서는 바로잡았다. 寺 : 내용과 잔획의 형태에 의거하여 ‘等’으로 추정하였고, 번역문에 반영하였다. 縝▨扮 : 내용과 잔획의 형태에 의거하여 ‘須朱粉’으로 추정하였고, 번역문에 반영하였다. 滸 : 내용과 잔획의 형태에 의거하여 ‘轂’으로 추정하였고, 번역문에 반영하였다. 單 : 내용과 잔획의 형태에 의거하여 ‘章’으로 추정하였고, 번역문에 반영하였다. 券 : 내용과 잔획의 형태에 의거하여 ‘夢’으로 추정하였고, 번역문에 반영하였다. 纔舂 : 내용과 잔획의 형태에 의거하여 ‘晩尋’으로 추정하였고, 번역문에 반영하였다. 餐 : 내용과 잔획의 형태에 의거하여 ‘饗’으로 추정하였고, 번역문에 반영하였다. 烏極 : 내용과 잔획의 형태에 의거하여 ‘應終’으로 추정하였고, 번역문에 반영하였다. 尊 : 내용과 잔획의 형태에 의거하여 ‘蒪’으로 추정하였고, 번역문에 반영하였다. 1 閑▨宮▨光具▨ : 내용과 잔획의 형태에 의거하여 ‘閑閑窺有燒丹計’로 추정하였고, 번역문에 반영하였다. 1 莫囊▨▨ : 내용과 잔획의 형태에 의거하여 ‘莫秘貴囊’으로 추정하였고, 번역문에 반영하였다. 1 山 : 1830년에 간행된 『관동지(關東誌)』에는 ‘江’으로 되어 있다. 1 瓮 : 1830년에 간행된 『관동지(關東誌)』에는 ‘翁’으로 되어 있다. 1 向寫綾 : 1830년에 간행된 『관동지(關東誌)』에는 ‘句寫淸’으로 되어 있어 번역문에서는 바로잡았다. 1 殊異 : 신광한(申光漢)의 『기재집(企齋集)』에는 “同被”로 되어 있다. 1 如▨ : 신광한의 『기재집(企齋集)』에는 “妙于”로 되어 있어 번역문에서는 보충하였다. 1 興 : 신광한의 『기재집(企齋集)』에는 “樂”로 되어 있다. 1 ▨▨受 : 신광한의 『기재집(企齋集)』에는 “而又能愛”로 되어 있어 번역문에서는 보충하였다. 20) ▨▨▨▨▨ : 신광한의 『기재집(企齋集)』에는 “世之齪齪者”로 되어 있어 번역문에서는 보충하였다. 2 ▨▨ : 신광한의 『기재집(企齋集)』에는 “嘗有”로 되어 있어 번역문에서는 보충하였다. 2 甚▨ : 신광한의 『기재집(企齋集)』에는 “求和甚勤”로 되어 있어 번역문에서는 보충하였다. 2 殘▨▨▨ : 신광한의 『기재집(企齋集)』에는 “戲書以還”로 되어 있어 번역문에서는 보충하였다. 2 ▨ : 신광한의 『기재집(企齋集)』에는 “噫”로 되어 있어 번역문에서는 보충하였다. 2 ▨ : 신광한의 『기재집(企齋集)』에는 “香”로 되어 있어 번역문에서는 보충하였다. 2 ▨▨▨漠 : 신광한의 『기재집(企齋集)』에는 “而世俗莫”로 되어 있어 번역문에서는 보충하였다. 2 ▨ : 신광한의 『기재집(企齋集)』에는 “獨”로 되어 있어 번역문에서는 보충하였다. 2 次▨▨▨▨向 : 신광한의 『기재집(企齋集)』에는 “吹細細香之句”로 되어 있어 번역문에서는 보충하였다. 2 ▨▨具 : 신광한의 『기재집(企齋集)』에는 “主人其”로 되어 있어 번역문에서는 보충하였다. 30) ▨▨斯 : 신광한의 『기재집(企齋集)』에는 “得於茲”로 되어 있어 번역문에서는 보충하였다. 3 원문 및 글자수 미상. 신광한의 『기재집(企齋集)』에도 없는 내용으로, 작성 시기 및 신광한이 작자임을 밝히는 내용으로 추정됨. 3 이사온은 강릉최씨 형조참판 최응현의 사위가 되어 강릉 오죽헌을 물려받았고, 이사온은 그의 사위 신명화(申命和)에게 오죽헌을 물려주었다. 신명화가 바로 신사임당의 아버지이니, 이사온은 신사임당의 외조부이다. 3 옛 글에, “개천에 버려진 토막나무도 그것을 다듬어서 단청칠을 하면 좋고 기물이 될 수 있다.” 하였다. 3 월(越)나라 미인 서시(西施)가 위장이 아파 얼굴을 찡그리면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동쪽에 살던 못생긴 여인이 이를 흉내 내었던 데서 온 말로, 주제넘게 남을 흉내 내는 것을 꼬집는 말이다. 3 원문의 “상전(桑田)”은 상전벽해(桑田碧海)를 가리킨다. 한(漢)나라 때의 신선인 왕원(王遠)이 마고(麻姑)를 초청하니, 그 뒤에 마고가 와서는 스스로 말하기를, “그대를 만난 이래로 이미 동해가 세 번 뽕밭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하였다. 『신선전(神仙傳)』 「왕원전(王遠傳)」참고. 3 남가일몽(南柯一夢)의 고사를 말한다. 당(唐)나라 때 순우분(淳于棼)이 술에 취하여 회화나무 아래에서 잠을 잤다. 꿈에 대괴안국(大槐安國)의 남가군(南柯郡)을 다스리면서 20년간이나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깨어나서 보니, 남가군은 바로 회화나무 남쪽 가지 아래에 있는 개미굴이었다고 한다. 『남가기(南柯記)』 3 원량(元亮)은 진(晉)나라 때의 은사(隱士)인 도연명(陶淵明)의 자이다. 일명은 잠(潛)인데 팽택 현령(彭澤縣令)이 되었다가 석 달 만에 벼슬을 버리고 율리(栗里)로 돌아오면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었다. 3 계응(季應)은 장계응(張季應)이니 곧 장한(張翰)이다. 그는 술 마시고 멋대로 즐기는 성품으로 사후 평판을 생각하라는 지적에 사후 명성이 생전의 한잔 술만 못하다고 대답한 일화가 전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任誕)」을 참조. 3 자는 관지(灌之), 호는 송암(松菴)이다. 좌의정을 역임했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1524년부터 강원감사로 재직했다. 40) 이 당시 신광한(申光漢)은 삼척군수로 재직 중이었다. 4 오죽헌의 대나무 숲을 가리킴. 두목(杜牧)의 「만청부(晚晴賦)」에 “대숲은 밖에서 둘러싼 십만의 장부 같아, 갑옷과 칼날 뒤섞여 빽빽이 빙 둘러 섰네.[竹林外裹兮十萬丈夫 甲刃樅樅密陳而環侍]”의 구절을 응용한 표현. 4 대나무를 가리킴. 진(晉)나라 때에 왕휘지(王徽之)가 “어떻게 하루라도 차군이 없이 지낼 수가 있겠는가.〔何可一日無此君耶〕”라며 대나무를 차군(此君)이라 불렀다. 『진서(晉書)』 「왕휘지열전(王徽之列傳)」을 참조. 4 역시 오죽헌의 대나무를 가리킴. 4 당나라 한유(韓愈)는 『송왕수재서(送王秀才序)』에서 과거낙방한 왕함(王含)에게 “술에 자신을 의탁한 채, 어찌 혼명(昏冥)하게 취한 술세상으로 도망갈 필요가 있겠소[尙何麴蘖之托而昏冥之逃也]”라며 술을 경계했었다. 4 소선(蘇仙)은 송나라 문인 소식(蘇軾)의 별칭이다. 소식(蘇軾)은 도연명을 숭상해서 일찍이 「음주(飮酒)」 시를 20수나 차운하기도 했다. 4 오죽헌 주인 이사온(李思溫)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4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에 나오는 사람으로, 옛날에 바둑을 매우 잘 둔 사람이다. 4 중국 진(晉)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 가운데 한 사람이다. 술을 매우 잘 마셨고, 술의 덕(德)을 노래한 「주덕송(酒德頌)」이란 작품을 짓기도 했다. 4 차군(此君)은 대나무이다. 왕희지(王羲之)의 아들인 왕휘지(王徽之)는 대나무를 무척 좋아하여 늘 가까이 하면서, 대나무를 마치 친구처럼 “차군(此君)”이라 불렀다고 하는 일화에서 유래한 말이다. 50) 당나라 두보(杜甫)는 벗 정국공(鄭國公) 엄무(嚴武)를 위해 「엄정공댁동영죽(嚴鄭公宅同咏竹)」이라는 시를 지어 “綠竹半含籜。新梢才出墻。色侵書帙晩。隱過酒樽凉。雨洗涓涓凈。風吹細細香。但令無剪伐。會見拂雲長”라고 읊었다. 5 두보는 위의 시에서 껍질 반만 벗은 죽순새싹, 담장으로 막 솟은 대나무가지, 책에 비친 대 그림자, 대 그늘에 익는 술, 비에 씻긴 대 숲, 은은한 대나무 향기 등 여섯 가지를 칭송했다.

현판(S04)

현판(S04
  • 원문烏竹軒敬次金三淵李鳴巖韻 巋然軒宇立岧。 丹碧重新色未凋。 大道三韓昭白日。 玄功萬古際蒼霄。 群陰莫謾欺陽杜。 百怪終知見晛消。 要識先生眞氣像。 憑欄快覩海天遙。 地炳天鍾此海濱。 丘山咫尺與爲隣。 生因胎敎承賢母。 運際河淸佐聖人。 滄渚宛看龍躍夕。 翠竿猶想鵠停晨。 申公宅相能成此。 降瑞當年擁百神。 層軒危竹對亭亭。 几席淸塵亦有馨。 蒙訣尙看餘手氣。 我來端欲請心經。 團和伯子春風坐。 交翠簾翁茂草庭。 函丈怳如承警咳。 七分奚啻拜丹靑。 五百年來挺大賢。 臨瀛直與武夷連。 高才退老曾推許。 好學顔生不貳遷。 間氣而生爲斯世。 中身則止奈乎天。 海山靈秀前光地。 惟有虛亭閱逝川。 德水後裔嵩鎭
  • 국문오죽헌에서 김삼연(金三淵)과 이명암(李鳴巖)의 시에 공경히 차운하다 이숭진(李嵩鎭) 우뚝한 집이 높디높게 서 있는데 단청을 새로 입혀 색조가 아직 선명하네. 큰 도는 삼한 전역에 두루 해처럼 밝은데 현묘한 공은 만고에 길이 하늘까지 닿겠네. 여러 음이 양을 속여 막을 수 없고 괴변들이 햇살에 소멸됨을 결국 알겠네. 바라건대 선생의 진짜 기상을 알고 싶다면 난간에 기대 저 멀리 수평선을 쾌히 보게나. 땅과 하늘이 영기를 모아준 이 바닷가는 이구산과 가깝게 서로 이웃이 될 만하네. 태교를 받고 태어나 어진 어머니를 따랐고 천년을 기다린 운을 타서 성인을 도왔네. 푸른 물가를 보면 저녁에 용이 뛰어오르는 듯 푸른 대나무를 보면 새벽에 고니가 서있는 듯 신공의 외손이 능히 이것을 이루었으니 상서롭게 태어나신 날 모든 신령이 보살폈으리.1 높은 집과 높은 대나무가 마주하여 꼿꼿한데 궤석의 고운 먼지조차 또한 향기가 나는 듯. 『격몽요결』에서 오히려 남겨진 친필을 보았고1 내가 온 김에 오로지 『심경』을 여쭙고 싶었네. 그 따뜻함은 명도 선생이 봄날에 앉아 계신 듯1 그 푸르름은 염계 선생이 뜰의 풀을 두신 것 같아1 선생께서 남겨주신 가르침을 황홀하게 받드니 어찌 칠분의 화상을 뵙는 것 같을 뿐이리오. 오백 년 만에 위대한 현인이 나셨으니1 임영은 바로 무이와 더불어 이어져 있네.1 퇴계 선생도 그 높은 재주를 인정하셨는데1 안연처럼 학문을 좋아해 작은 허물도 없으셨네. 천지 기운1 받아 태어나니 이 세상 위하려 했는데 중년20)에 돌아가시니 천명을 어이하랴. 선생의 공적이 남아 있는 신령한 이 산하에 빈 집만 홀로 남아 흘러가는 물을 지켜보네. 덕수(德水) 이씨의 후예(後裔) 이숭진(李嵩鎭)
  • 번역오죽헌에서 김삼연(金三淵)과 이명암(李鳴巖)의 시에 공경히 차운하다 이숭진(李嵩鎭) 우뚝한 집이 높디높게 서 있는데 단청을 새로 입혀 색조가 아직 선명하네. 큰 도는 삼한 전역에 두루 해처럼 밝은데 현묘한 공은 만고에 길이 하늘까지 닿겠네. 여러 음이 양을 속여 막을 수 없고 괴변들이 햇살에 소멸됨을 결국 알겠네. 바라건대 선생의 진짜 기상을 알고 싶다면 난간에 기대 저 멀리 수평선을 쾌히 보게나. 땅과 하늘이 영기를 모아준 이 바닷가는 이구산과 가깝게 서로 이웃이 될 만하네. 태교를 받고 태어나 어진 어머니를 따랐고 천년을 기다린 운을 타서 성인을 도왔네. 푸른 물가를 보면 저녁에 용이 뛰어오르는 듯 푸른 대나무를 보면 새벽에 고니가 서있는 듯 신공의 외손이 능히 이것을 이루었으니 상서롭게 태어나신 날 모든 신령이 보살폈으리.1 높은 집과 높은 대나무가 마주하여 꼿꼿한데 궤석의 고운 먼지조차 또한 향기가 나는 듯. 『격몽요결』에서 오히려 남겨진 친필을 보았고1 내가 온 김에 오로지 『심경』을 여쭙고 싶었네. 그 따뜻함은 명도 선생이 봄날에 앉아 계신 듯1 그 푸르름은 염계 선생이 뜰의 풀을 두신 것 같아1 선생께서 남겨주신 가르침을 황홀하게 받드니 어찌 칠분의 화상을 뵙는 것 같을 뿐이리오. 오백 년 만에 위대한 현인이 나셨으니1 임영은 바로 무이와 더불어 이어져 있네.1 퇴계 선생도 그 높은 재주를 인정하셨는데1 안연처럼 학문을 좋아해 작은 허물도 없으셨네. 천지 기운1 받아 태어나니 이 세상 위하려 했는데 중년20)에 돌아가시니 천명을 어이하랴. 선생의 공적이 남아 있는 신령한 이 산하에 빈 집만 홀로 남아 흘러가는 물을 지켜보네. 덕수(德水) 이씨의 후예(後裔) 이숭진(李嵩鎭)
  • 역주삼연(三淵)은 김창흡(金昌翕 1653-172의 호(號)이다. ‘낙송자(洛誦子)’라는 호(號)로도 불렸다. 명암(鳴巖)은 이해조(李海朝 1660-171의 호(號)이다. 1720년에 이숭진(李嵩鎭)이 지은 「충효사상량문(忠孝祠上樑文)」과 「충효사사주갑기(忠孝祠四周甲記)」, 「충효사절목(忠孝祠節目)」, 「축문(祝文)」 등과 가첩(家牒) 등이 남아 있어,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생존했던 인물로 추정된다. 온갖 음모가 햇살에 눈이 녹듯 사라짐을 말한다. 당쟁이 극심했던 중국 송나라 때 왕안석(王安石)은 『하여참정계(賀呂參政啟)』라는 글에서 “부당한 말과 편파적인 행동들은 햇살에 눈이 녹듯 절로 사라진다”고 말한 바 있다. 이 구절은 송시열이 제자 권상하에게 보낸 「영고산구곡가(詠高山九曲歌)」라는 시를 의식한 표현이다. 송시열은 이 시에서 “오백 년 만에 하늘과 땅 영기를 모았네(五百天鍾地炳靈)”라며 율곡 선생을 칭송한 바 있다. 이구산(尼丘山)은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에 있는 산 이름으로, 공자가 출생한 곳이다. 여기서는 율곡선생의 탄생이 공자의 탄생과 비견됨을 말한 것이다. 어진 어머니는 율곡 선생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을 말한다. 황하의 물은 본디 탁하여서 맑을 때가 없으나 천 년마다 한 차례씩 맑아지는데, 이는 성인이 태어날 조짐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율곡이 태어나 성현의 도를 계승함을 가리킨다. 여기서 고니는 뛰어난 인물을 의미한다. 중국 당나라 한유(韓愈)의 「전중소감마군묘명(殿中少監馬君墓銘)」에 “푸른 대나무와 푸른 오동나무에 난새와 고니가 우뚝 선 듯하다.〔翠竹碧梧 鸞鵠停峙〕”라 한 바 있다. 진사 신명화(申命和 1476-152는 오죽헌의 주인이며 신사임당의 아버지이다. 따라서 진사 신명화의 외손은 바로 율곡 선생이다. 1 신사임당이 태몽으로 검은 용이 날아 들어오는 꿈을 꾸었기에, 이 구절은 율곡 선생의 탄생을 찬미한 말이다. 1 오죽헌(烏竹軒) 어제각(御製閣)에는 율곡 선생의 친필로 적힌 『격몽요결(擊蒙要訣)』 초고본이 보관되어 있다. 1 명도(明道) 선생은 중국 송나라 유학자 정호(程顥)인데, 홀로 앉아 있을 적에는 석고상(石膏像)처럼 보이다가도, 일단 사람을 접하면 봄날 한 덩어리의 화기[一團和氣]가 뭉쳐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고사의 주인공이다. 1 염계(濂溪) 선생은 중국 송나라 유학자 주돈이(周敦頤)인데, 평소 뜰의 풀을 뽑지 않고 “나의 의사와 일반이다.[與自家意思一般]”라고 하며, 풀 한 포기마저 천지의 생생한 기운을 받은 생명으로 존중했다고 한다. 1 이 구절도 송시열이 「영고산구곡가(詠高山九曲歌)」라는 시에서 율곡 선생을 두고 “오백 년 만에 하늘과 땅 영기를 모았네(五百天鍾地炳靈)”라고 칭송한 구절과 관련이 있다. 1 임영(臨瀛)은 율곡 선생이 태어난 강릉이고, 무이(武夷)는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주희(朱熹)가 살았던 곳이다. 1 율곡 선생은 23세때 도산(陶山)으로 퇴계(退溪) 선생을 뵈러 가서, 주일무적(主一無適)ㆍ응접사물(應接事物)의 요령을 물었다. 퇴계 선생은 일찍이 편지에서 “세상에 영특한 인재가 한량없이 많지만 옛날 학문에 마음 두기를 좋아하지들 않는데, 그대처럼 뛰어난 재주를 지닌 젊은 사람이 바른길에 발을 내디뎠으니, 앞으로 성취될 바가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천만번 부탁하니 스스로 더욱더 원대(遠大)한 뜻을 기약하라.” 고 율곡을 칭찬했다. 1 학문을 좋아하는 제자가 누구냐는 노(魯)나라 애공(哀公)의 질문에, 공자는 가장 아꼈던 제자인 안회를 거론하며 “다른 사람에게 화를 옮기지 않았고, 같은 잘못을 다시 범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한 일화가 있다. 1 원문은 간기(間氣)인데, ‘간기호걸(間氣豪傑)’의 준말이다. 세상에 어쩌다가 나타나게 되는 불세출의 영웅호걸이라는 의미이다. 20) 『서경(書經)』에 “문왕이 중신(中身)에 천명을 받았다”고 했는데,한나라 정현(鄭玄)이 중신(中身)을 ‘중년(中年)’이라고 주석했다. 한나라 채옹(蔡邕)은 『독단(獨斷)』에서 “중신에 일찍 죽으면 ‘도(悼)’라고 한다.”고 했다.

현판(S05)

현판(S05
  • 원문烏竹軒者。栗谷文成先生。降生之室也。在江陵府之北坪村。軒故申氏宅也。處士權公處均。與先生同爲申氏外孫。而權氏奉申氏祀。故軒爲權氏有。重修於肅宗丁亥。丈壧鄭文敬公記之。又重修於今上壬寅。而皆仍軒之舊制。越六年。御製閣新建于軒東。則主人權斯文漢舒來請記其事。 戊申春。主人之從父弟漢緯。以記事官侍上。上下詢斯軒始末。及聞擊蒙要訣手寫本及舊硯。藏在軒中。則亟命馳驛。上之御製要訣題語及硯銘題語。則命閣臣。書于要訣卷首。銘則以御筆刻于硯背塡黃。命江原道臣。刱小閣于軒㫄。奉安焉。名其閣曰御製閣。 嗚呼。先生之道。百世所宗也。雖書卷筆硯之微。其有手澤所及者。人莫不愛惜尊慕。乃聖上親御翰墨。引重而發揮之。則是書與是硯。將見與天壤俱敝。於虖。豈不盛哉。軒之中央。樑面揭新刻夢龍室三字者。以先生生卒。有夢龍之異也。軒之始末。有文敬公記文。 在上之十三年。孟秋上浣。後學淸風金鍾秀謹書。
  • 국문(오죽헌)김종수(金鍾秀) 오죽헌(烏竹軒)은 문성공(文成公) 율곡(栗谷) 선생이 탄생한 집으로, 강릉부(江陵府) 북평촌(北坪村)에 있다. 오죽헌은 돌아가신 신(申)씨의 집이다. 처사(處士) 권처균(權處均) 공은 율곡선생과 함께 신씨의 외손인데, 권씨가 신씨의 제사를 받들게 되었다. 그래서 오죽헌이 권씨의 소유가 되었다. 숙종(肅宗) 정해년(170에 중수하였는데, 문경공(文敬公)이신 장암(丈巖) 정호(鄭澔) 공이 중수기를 썼다. 또 금상(今上 : 정조(正祖)) 임인년(178에 다시 중수를 하게 되었는데, 오죽헌의 옛 제도를 모두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6년이 지나서 어제각(御製閣)을 오죽헌의 동쪽에 새로 건립하였는데, 오죽헌 주인인 우리 유가(儒家)의 권한서(權漢舒)가 와서 그 전말의 일을 기록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지난 무신년(178 봄 오죽헌 주인의 당숙(堂叔) 권한위(權漢緯)가 기사관(記事官)으로서 임금을 모시게 되었다. 군신 상하가 오죽헌의 시말(始末)을 자세하게 물었는데, 『격몽요결(擊蒙要訣)』 친필본과 오래된 벼루가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듣고서 급히 명령을 내려 역말을 달리게 하였다. 임금께서 『격몽요결』에 붙일 글과 벼루에 새길 명문(銘文)을 짓고서, 규장각신에게 명령하여 『격몽요결』의 첫머리에 적게 하고, 명문(銘文)은 임금의 친필을 벼루 뒷면에 새기게 하고 황색으로 메웠다. 그리고 강원도를 맡은 신하에게 명령하여 오죽헌 옆에 작은 건물을 짓고 이를 봉안(奉安)하게 하시니, 그 건물의 이름이 어제각(御製閣)이다. 아! 율곡 선생의 도는 백대토록 으뜸으로 인정받는 바이다. 비록 서책과 벼루가 보잘 것 없는 물건일 뿐이나 선생의 손길이 닿았던 것이기에, 사람마다 아끼고 우러르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제 성스러운 우리 임금께서 직접 글을 짓고 존중하여 선양하시니, 이 서책과 이 벼루는 장차 천지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할 것이다. 오호! 어찌 성대한 일이 아닌가! 오죽헌의 중앙 대들보에 몽룡실(夢龍室)이란 세 글자를 새로 새겨 걸었다. 이는 율곡 선생께서 태어나시고 돌아가셨을 때 용이 꿈에서 보인 경이로운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죽헌의 시말(始末)에 관한 내용은 문경공(文敬公) 정호(鄭澔) 공의 기문(記文)에 다 있다. 우리 임금 재위 13년(178 첫가을 상완(上浣)에 후학(後學) 청풍(淸風) 김종후(金鍾秀)는 삼가 쓰다.
  • 번역(오죽헌)김종수(金鍾秀) 오죽헌(烏竹軒)은 문성공(文成公) 율곡(栗谷) 선생이 탄생한 집으로, 강릉부(江陵府) 북평촌(北坪村)에 있다. 오죽헌은 돌아가신 신(申)씨의 집이다. 처사(處士) 권처균(權處均) 공은 율곡선생과 함께 신씨의 외손인데, 권씨가 신씨의 제사를 받들게 되었다. 그래서 오죽헌이 권씨의 소유가 되었다. 숙종(肅宗) 정해년(170에 중수하였는데, 문경공(文敬公)이신 장암(丈巖) 정호(鄭澔) 공이 중수기를 썼다. 또 금상(今上 : 정조(正祖)) 임인년(178에 다시 중수를 하게 되었는데, 오죽헌의 옛 제도를 모두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6년이 지나서 어제각(御製閣)을 오죽헌의 동쪽에 새로 건립하였는데, 오죽헌 주인인 우리 유가(儒家)의 권한서(權漢舒)가 와서 그 전말의 일을 기록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지난 무신년(178 봄 오죽헌 주인의 당숙(堂叔) 권한위(權漢緯)가 기사관(記事官)으로서 임금을 모시게 되었다. 군신 상하가 오죽헌의 시말(始末)을 자세하게 물었는데, 『격몽요결(擊蒙要訣)』 친필본과 오래된 벼루가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듣고서 급히 명령을 내려 역말을 달리게 하였다. 임금께서 『격몽요결』에 붙일 글과 벼루에 새길 명문(銘文)을 짓고서, 규장각신에게 명령하여 『격몽요결』의 첫머리에 적게 하고, 명문(銘文)은 임금의 친필을 벼루 뒷면에 새기게 하고 황색으로 메웠다. 그리고 강원도를 맡은 신하에게 명령하여 오죽헌 옆에 작은 건물을 짓고 이를 봉안(奉安)하게 하시니, 그 건물의 이름이 어제각(御製閣)이다. 아! 율곡 선생의 도는 백대토록 으뜸으로 인정받는 바이다. 비록 서책과 벼루가 보잘 것 없는 물건일 뿐이나 선생의 손길이 닿았던 것이기에, 사람마다 아끼고 우러르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제 성스러운 우리 임금께서 직접 글을 짓고 존중하여 선양하시니, 이 서책과 이 벼루는 장차 천지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할 것이다. 오호! 어찌 성대한 일이 아닌가! 오죽헌의 중앙 대들보에 몽룡실(夢龍室)이란 세 글자를 새로 새겨 걸었다. 이는 율곡 선생께서 태어나시고 돌아가셨을 때 용이 꿈에서 보인 경이로운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죽헌의 시말(始末)에 관한 내용은 문경공(文敬公) 정호(鄭澔) 공의 기문(記文)에 다 있다. 우리 임금 재위 13년(178 첫가을 상완(上浣)에 후학(後學) 청풍(淸風) 김종후(金鍾秀)는 삼가 쓰다.
  • 역주壧 : 巖 정호(鄭澔 1648-173는 본관이 연일(延日). 자는 중순(仲淳), 호는 장암(丈巖)이다. 정철의 4대손으로 송시열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일생을 노론의 선봉으로 활약했다. 문경공(文敬公)은 그의 시호이다. 상완(上浣)은 초순(初旬)이다. 중국 당 나라 제도에서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들에게 10일 만에 휴가를 주는데, 관복을 세탁하라는 명분이었다. 그래서 완(浣)을 한(澣)이라고도 한다. 중순은 중완, 하순에는 하완이다.

현판(S06)

현판(S06
  • 원문烏竹軒重修記 臨瀛府北坪村。故有烏竹軒。卽己卯名賢進士申公命和之故宅。申公無後。只有宅相二姓。一卽故處士權君處均。一卽栗谷李先生。先生實誕生于是室。先生所撰擊蒙要訣本草及所御筆硯。尙今葆藏。而主其宅者。卽權君之玄孫允載也。感前賢之光胚。慨遺宅之將墟。鳩材募工。剋期改葺。一日。來訪其隣郡之三陟府使鄭澔。屬以烏竹軒重修記文曰。先生與子先祖松江公。爲道義之交。今玆之役。子烏得無言。澔遂再拜而識之曰。 小子聞先生之風。慕先生之道。不獨以世契之篤。其有得於國人之誦熟矣。蓋先生資隣生知。聞道最早。不由師承。一蹴高明。旁泝洛閩而直接洙泗。前此我東以理學名世者。不無一二。而其見識之高明。造詣之精深。未有若先生之純如也。其論四七理氣之說。無非發明朱子之蘊奧。及至明使黃洪憲求聞克己復禮爲仁之義。先生著示其說。一遵朱夫子之旨。陰折陸學之邪。黃乃亟稱曰。此說儘好。當歸布中國。輒以栗谷先生稱之。然則先生之學。不獨爲東方理學之宗。實有聞於天下後世。世之以吾先生爲東方朱子者。非侈言也。 嗚呼。自古聖賢之生。豈偶然哉。舜文之生。以其地則千有餘里。以其世則千有餘年。而其道則若合符節。孟子謹書其生卒。以著明之。今先生生於海東之東遐陬之鄕。距閩之考亭幾萬有餘里。自宋之紹興。至皇明嘉靖。且幾五百餘年。先生道學之正。與朱子相符。不啻舜文之一揆。則其生卒之詳。世必有謹書以著之者。而第其故宅之猶存。遺蹟之徵異。尤何可泯沒也。曾聞先生始誕之夕。有黑龍飛入寢室之夢。及先生沒。又有黑龍飛騰上天之異。與夫闕里麟告之兆。又何絶相符也。今因記蹟之文。不可不倂載其實。而是軒重修。始在丁亥。其時峴山宰鄭侯必東。實相其役。繼而至者。李侯海朝亦助而訖其工。斯二侯者。爲治以簡約。待士以禮義。尊慕儒賢。興廢敦化之政。及於傍郡又如此。非今之爲吏者所能及也。 仍次金處士子益韻 間氣鍾英大海濱。 天資自是性之隣。 待文何必知豪傑。 非子誰能牖我人。 古宅空餘烏竹號。 異祥猶記黑龍晨。 倘天不靳數年殷。 所造優優不日神。
  • 국문오죽헌중수기, 정호(鄭澔 1648-173 강릉 북평촌에는 예로부터 오죽헌(烏竹軒)이 있으니, 곧 기묘사화(己卯士禍)에 희생된 선비인 진사 신명화(申命和 1476-152 공의 고택이다. 신명화 공은 후사(後嗣)가 없고 다만 두 명의 외손자를 두었다. 한 분은 처사(處士) 권처균(權處均) 군이고, 또 한 분은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 선생이다. 율곡 선생은 이 집에서 태어나셨다. 율곡 선생이 지은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초고본(草稿本)과 하사(下賜) 받은 붓과 벼루가 지금까지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다. 지금 이 집의 주인은 권처균 군의 현손(玄孫)인 권윤재(權允載)인데, 율곡 선생이 태어나신 곳이라는 영광에 감동하고, 조상이 물려주신 집이 낡아 가는 것을 속상해 했다. 그래서 목재를 모으고 장인(匠人)을 모집하여 집을 수리하고자 하였다. 하루는 권윤재가 이웃 고을인 삼척에서 부사로 있는 정호(鄭澔 1648-173를 방문했다. 그는 「오죽헌중수기(烏竹軒重修記)」의 글을 지어달라고 부탁하며 말하길, “율곡 선생과 그대의 선조 송강 정철(鄭澈 1536-159 공은 도의(道義)로 맺은 친구입니다. 이제 이번 공사에 대해 그대가 어찌 한마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정호는 마침내 두 번 절을 하고 글을 쓴다. “저는 율곡 선생의 풍모(風貌)를 들어 알고, 율곡 선생의 도학(道學)를 숭모합니다. 이는 단지 대대로 사귄 돈독한 친분 때문만이 아닙니다. 율곡 선생의 말씀을 익숙히 외우는 백성들을 보고 느낀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율곡 선생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다 알고 나신 분만 같습니다. 도(道)를 아신 것이 누구보다도 빠르셨고, 학맥에 힘입지 않고서도 일거에 높은 수준을 이루어서, 곁으로는 낙민(洛閩)으로 소급하고, 곧바로는 수사(洙泗)의 학문에까지 그 연원이 닿으셨습니다. 이보다 앞서 우리나라에서 성리학으로 명성을 이룬 분이 한두 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높은 식견과 깊은 조예에 있어 율곡 선생만큼 순수한 분은 아직 없었습니다.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과 ‘기발이승일도(氣發理乘一途)’ 등의 학설은 모두 주자의 정미한 뜻을 밝히신 것입니다. 명나라 사신 황홍헌(黃洪憲)이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 구절에 대해서 해설을 요구했을 때 율곡 선생이 이 학설을 글로 써서 보여주셨고, 주자 학설의 요지를 일관되게 따르면서 육구연(陸九淵 1139-119의 잘못된 학설을 넌지시 꺾으셨습니다. 이에 황홍헌은 ‘이 해설이 다 훌륭하니 꼭 가지고 돌아가 중국에 전파하겠다.’고 하며 극구 율곡 선생을 칭송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율곡 선생의 학문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최고일 뿐만 아니라 실로 천하후세에도 알려지신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우리 율곡 선생을 ‘동방의 주자(朱子)’라고 말하는 것이 과분한 말은 아닙니다. 아! 예로부터 성현의 탄생이 어찌 우연이겠습니까? 순(舜)임금과 문왕(文王)의 탄생이 거리로 천여 리가 떨어져 있고, 시간으로 천여 년의 차이가 있어도 그 도(道)는 부절(符節)을 맞춘 듯이 똑같았으니 이 사실은 『맹자(孟子)』에서도 그 생몰(生沒)을 삼가 기록하여 밝혀둔 바입니다. 지금 율곡 선생은 해동의 동쪽 먼 모퉁이의 고장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주자가 돌아가신 중국 복건성(福建城)의 고정촌(考亭村)과는 공간적 거리가 몇 만 리 떨어져 있습니다. 주자가 사셨던 중국 송나라 소흥(紹興 1131-116 시기로부터 율곡 선생이 사셨던 중국 명나라 가정(嘉靖 1522-156 연간(年間)에 해당하는 시기까지는 오백여 년의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율곡 선생의 도학의 올바름은 주자와 부절(符節)을 맞춘 듯이 똑같습니다. 단지 순임금과 문왕만이 일치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그 생몰연대(生沒年代)가 자세하니, 세상에는 반드시 이 일을 삼가 기록하여 밝힐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가까스로 아직 남아 있는 고택(故宅)과 기이한 징조를 미리 알려준 유적(遺蹟)을 더욱 어찌 사라지게 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제가 일찍이 들으니 율곡 선생이 태어나셨던 날 저녁에 흑룡이 침실 안으로 날아 들어오는 태몽이 있었다고 하고, 또한 율곡 선생이 돌아가시던 날에는 흑룡이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이적(異蹟)이 있었다 합니다. 이는 기린이 나타나 탄생을 알려주었다는 공자(孔子)의 태몽과도 부절(符節)을 맞춘 듯 완전히 똑같습니다. 지금 이 유적(遺蹟)에 대한 글을 쓰면서 관련 사실을 싣지 않을 수 없어 함께 씁니다. 오죽헌의 중수는 정해년(170에 시작되었고, 그 당시 양양(襄陽) 군수가 정필동(鄭必東 1653-171 사또였는데 이 중수사업을 실제로 도왔습니다. 후임으로 부임한 이해조(李海朝 1660-171 사또 또한 이를 도왔고 공사를 마쳤습니다. 이 두 분의 사또는 번거롭지 않게 정사를 다스리고, 선비를 예의로 대우했습니다. 유현(儒賢)을 숭모하여 무너진 것을 일으켜 세우고 백성을 교화하는 정치를 베풀어 이웃 고을에까지 이와 같은 혜택을 끼친 것입니다. 이는 요즘의 관리들이 능히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이어서 처사(處士) 김자익(金子益)의 시에 다음과 같이 차운한다. 큰 바닷가에 천지간 기운이 영특함을 모아 자질이 본디 천성대로 거의 이룬 분 같았네 영웅이신 걸 문왕을 기다려야만 하필 알리오 그대 아니었다면 누가 우리를 인도했겠는가 고택엔 덩그마니 ‘오죽헌’ 이름만 남긴 듯해도 상서로운 그 새벽 흑룡 태몽을 아직 기억하리 만약 하늘이 몇 년 더 인색하지만 않았어도 훌륭하게 이룬 경지 불원간 더 신명해졌으리
  • 번역오죽헌중수기, 정호(鄭澔 1648-173 강릉 북평촌에는 예로부터 오죽헌(烏竹軒)이 있으니, 곧 기묘사화(己卯士禍)에 희생된 선비인 진사 신명화(申命和 1476-152 공의 고택이다. 신명화 공은 후사(後嗣)가 없고 다만 두 명의 외손자를 두었다. 한 분은 처사(處士) 권처균(權處均) 군이고, 또 한 분은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 선생이다. 율곡 선생은 이 집에서 태어나셨다. 율곡 선생이 지은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초고본(草稿本)과 하사(下賜) 받은 붓과 벼루가 지금까지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다. 지금 이 집의 주인은 권처균 군의 현손(玄孫)인 권윤재(權允載)인데, 율곡 선생이 태어나신 곳이라는 영광에 감동하고, 조상이 물려주신 집이 낡아 가는 것을 속상해 했다. 그래서 목재를 모으고 장인(匠人)을 모집하여 집을 수리하고자 하였다. 하루는 권윤재가 이웃 고을인 삼척에서 부사로 있는 정호(鄭澔 1648-173를 방문했다. 그는 「오죽헌중수기(烏竹軒重修記)」의 글을 지어달라고 부탁하며 말하길, “율곡 선생과 그대의 선조 송강 정철(鄭澈 1536-159 공은 도의(道義)로 맺은 친구입니다. 이제 이번 공사에 대해 그대가 어찌 한마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정호는 마침내 두 번 절을 하고 글을 쓴다. “저는 율곡 선생의 풍모(風貌)를 들어 알고, 율곡 선생의 도학(道學)를 숭모합니다. 이는 단지 대대로 사귄 돈독한 친분 때문만이 아닙니다. 율곡 선생의 말씀을 익숙히 외우는 백성들을 보고 느낀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율곡 선생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다 알고 나신 분만 같습니다. 도(道)를 아신 것이 누구보다도 빠르셨고, 학맥에 힘입지 않고서도 일거에 높은 수준을 이루어서, 곁으로는 낙민(洛閩)으로 소급하고, 곧바로는 수사(洙泗)의 학문에까지 그 연원이 닿으셨습니다. 이보다 앞서 우리나라에서 성리학으로 명성을 이룬 분이 한두 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높은 식견과 깊은 조예에 있어 율곡 선생만큼 순수한 분은 아직 없었습니다.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과 ‘기발이승일도(氣發理乘一途)’ 등의 학설은 모두 주자의 정미한 뜻을 밝히신 것입니다. 명나라 사신 황홍헌(黃洪憲)이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 구절에 대해서 해설을 요구했을 때 율곡 선생이 이 학설을 글로 써서 보여주셨고, 주자 학설의 요지를 일관되게 따르면서 육구연(陸九淵 1139-119의 잘못된 학설을 넌지시 꺾으셨습니다. 이에 황홍헌은 ‘이 해설이 다 훌륭하니 꼭 가지고 돌아가 중국에 전파하겠다.’고 하며 극구 율곡 선생을 칭송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율곡 선생의 학문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최고일 뿐만 아니라 실로 천하후세에도 알려지신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우리 율곡 선생을 ‘동방의 주자(朱子)’라고 말하는 것이 과분한 말은 아닙니다. 아! 예로부터 성현의 탄생이 어찌 우연이겠습니까? 순(舜)임금과 문왕(文王)의 탄생이 거리로 천여 리가 떨어져 있고, 시간으로 천여 년의 차이가 있어도 그 도(道)는 부절(符節)을 맞춘 듯이 똑같았으니 이 사실은 『맹자(孟子)』에서도 그 생몰(生沒)을 삼가 기록하여 밝혀둔 바입니다. 지금 율곡 선생은 해동의 동쪽 먼 모퉁이의 고장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주자가 돌아가신 중국 복건성(福建城)의 고정촌(考亭村)과는 공간적 거리가 몇 만 리 떨어져 있습니다. 주자가 사셨던 중국 송나라 소흥(紹興 1131-116 시기로부터 율곡 선생이 사셨던 중국 명나라 가정(嘉靖 1522-156 연간(年間)에 해당하는 시기까지는 오백여 년의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율곡 선생의 도학의 올바름은 주자와 부절(符節)을 맞춘 듯이 똑같습니다. 단지 순임금과 문왕만이 일치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그 생몰연대(生沒年代)가 자세하니, 세상에는 반드시 이 일을 삼가 기록하여 밝힐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가까스로 아직 남아 있는 고택(故宅)과 기이한 징조를 미리 알려준 유적(遺蹟)을 더욱 어찌 사라지게 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제가 일찍이 들으니 율곡 선생이 태어나셨던 날 저녁에 흑룡이 침실 안으로 날아 들어오는 태몽이 있었다고 하고, 또한 율곡 선생이 돌아가시던 날에는 흑룡이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이적(異蹟)이 있었다 합니다. 이는 기린이 나타나 탄생을 알려주었다는 공자(孔子)의 태몽과도 부절(符節)을 맞춘 듯 완전히 똑같습니다. 지금 이 유적(遺蹟)에 대한 글을 쓰면서 관련 사실을 싣지 않을 수 없어 함께 씁니다. 오죽헌의 중수는 정해년(170에 시작되었고, 그 당시 양양(襄陽) 군수가 정필동(鄭必東 1653-171 사또였는데 이 중수사업을 실제로 도왔습니다. 후임으로 부임한 이해조(李海朝 1660-171 사또 또한 이를 도왔고 공사를 마쳤습니다. 이 두 분의 사또는 번거롭지 않게 정사를 다스리고, 선비를 예의로 대우했습니다. 유현(儒賢)을 숭모하여 무너진 것을 일으켜 세우고 백성을 교화하는 정치를 베풀어 이웃 고을에까지 이와 같은 혜택을 끼친 것입니다. 이는 요즘의 관리들이 능히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이어서 처사(處士) 김자익(金子益)의 시에 다음과 같이 차운한다. 큰 바닷가에 천지간 기운이 영특함을 모아 자질이 본디 천성대로 거의 이룬 분 같았네 영웅이신 걸 문왕을 기다려야만 하필 알리오 그대 아니었다면 누가 우리를 인도했겠는가 고택엔 덩그마니 ‘오죽헌’ 이름만 남긴 듯해도 상서로운 그 새벽 흑룡 태몽을 아직 기억하리 만약 하늘이 몇 년 더 인색하지만 않았어도 훌륭하게 이룬 경지 불원간 더 신명해졌으리
  • 역주낙(洛)은 낙양 출신의 송나라 성리학자 정호(程顥 1032-108와 정이(程頤 1033-110 형제를, 민(閩)은 민중(閩中) 출신의 주자(朱子 1130-1200)를 가리킨다. 수사(洙泗)는 노나라 곡부(曲阜)에 있는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로서 공자를 상징한다. 이이(李珥)가 죽기 2년 전인 1582년 겨울에 명(明)나라에서 국사편수(國史編修) 황홍헌(黃洪憲)과 공과급사중(工科給事中) 왕경민(王敬民)이 사신으로 와서 문묘(文廟)에 배알(拜謁)할 적에 벽에 걸린 정자(程子)의 「사잠(四箴)」을 보고 이이에게 극기복례(克己復禮)가 인(仁)의 뜻이 되는 뜻에 대해 강의해 줄 것을 청하자, 이이가 설명하는 글을 지어 주었다. 두 사신이 대여섯 차례나 읽어 보고, 그 설명하는 글이 지극히 좋아 중국 조정에 가서 꼭 전포(傳布)하겠다고 한 일이 있다.

현판(S07)

현판(S07
  • 원문烏竹軒
  • 국문오죽헌(烏竹軒)
  • 번역오죽헌(烏竹軒)
  • 역주검은 대나무가 있는 집

현판(S08)

현판(S08
  • 원문次 晩作江湖自在身。 靑懷孤苦與誰隣。 平生浪詠詩猶好。 餘事閑棊手亦珎。 萬樹開花春後老。 一庭芳草雨中新。 只應長對此君飮。 孰是爲賓孰主人。 甲申季夏。監司 趙邦彦。 次 自許元非匏繫身。 放情湖海更無隣。 秋碁百世親爲▨。 堯飮千鐘未足珎。 昔日橋門知有舊。 當時偃室色如新。 從誰細問淇園趣。 烏竹軒中一故人。 乙酉季秋。江陵府使。 朴光榮。 次 墻下撓雲立玉身。 高標獨與雲霜隣。 六千君子世皆仰。 十萬丈夫▨▨珎。 奉櫛旣多花葉美。 侑杯還有柳枝新。 百年適意斯爲樂。 何用丹丘羽化人。 閑作林泉自在身。 靑松綠竹與罔隣。 一軒情景眞堪老。 萬斛明珠未足珎。 衰謝等閑年矢促。 狂▨遮莫世情新。 羨他占得溪山興。 況我東西南北人。 無竹能令俗一身。 渭濱千畝作芳隣。 消秋▨聽胡琴棙。 ▨1日閑斟▨1露珎。 煙纛▨▨1風外亂。 鴉鬟點點雨邊新。 何人乾沒東華土。 無慮無思是德人。 癸未春 前承旨 崔世節
  • 국문차운하다 조방언(趙邦彦 1469-153 늘그막 강호에서 자유로이 머물면서, 누구와 이웃하여 속마음을 풀어낼까. 평생을 읊조렸지만 시짓기 아직 좋고, 여가에 바둑 두니 그 솜씨 또한 보배로다 . 온 나무에 폈던 꽃들 봄 지나 시들어도, 뜰 가득한 향그런 풀 빗속에 싱그럽다. 대나무 마주하고 두고두고 마실 터이니, 어느 누가 손님이고 어느 누가 주인일까. 갑신년(152 늦여름 강원감사 조방언(趙邦彦)1 차운하다 박광영(朴光榮 1463-153 원래 얽매인 사람1 아니었다고 자부하지만, 호해를 맘껏 즐기느라 다른 이웃은 없네. 혁추1처럼 한 백 년 바둑으로 몸소 즐거움 삼았고, 요(堯)1처럼 천 종의 술 마신들 값진 일은 못 됐네. 예전의 강문교엔 옛 모습 남아 있음을 알겠는데, 당시 수령의 거처1는 여전히 단청 빛이 새롭구나. 누구더러 기원(淇園)1의 정취를 자세히 물으랴. 오죽헌에 살았던 옛 분에게 물으면 되는 것을. 을유년(152 늦가을 강릉 부사 박광영(朴光榮) 차운하다 최세절(崔世節 1479-15320) 담 아래 감도는 구름가 옥 같은 몸 꼿꼿한데,2 높은 대나무 끝 제 홀로 구름서리와 이웃했네. 육천 명의 군자를2 세상 모두 우러르는데, 십만 명의 장부는2 나의 소중한 보배일세. 몸 봉양하는 사이 허다한 꽃잎사귀 고와지고, 주고 받는 술잔에 또다시 버들가지 새롭구나. 뜻대로 사는 한 백년 이런 게 즐거움이니, 신선 땅의 신선된들2 그 무엇에 쓰리오. 한가로이 자연에서 여유롭게 지내다보면, 청송과 녹죽을 함께 이웃 삼네. 오죽헌 온 경치에 늙어가도 진정 좋으리니, 만 곡(斛)의 진주라도 그리 보배가 아니리. 쇠잔해도 늙음 재촉하는 세월쯤은 아랑곳 않고, 짐짓 호기부려 생경한 인정세태 멋대로 사네. 산수의 즐거움 독차지한 남들을 부러워할 법한데, 하물며 나같이 동서남북 떠도는 벼슬아치임에랴.2 대나무 없으면 이 한 몸 속되게 하니, 위수 물가2 같은 대숲 천 이랑 좋은 이웃 되었네. 근심을 풀려고 호금 연주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고, 한가롭게 날을 보내며 보배처럼 좋은 술도 마시네. 펄럭 펄럭대는 변방의 깃발은 바람 끝에 어지럽고, 한점 한점의 검은 빛 산 모습은2 빗속에 또렷하니, 그 누가 동쪽의 좋은 땅을 거저 빼앗으려 하는가. 근심도 생각도 없는 이가 유덕한 사람인 것을. 계미년(152 봄 전(前) 승지(承旨) 최세절(崔世節)
  • 번역차운하다 조방언(趙邦彦 1469-153 늘그막 강호에서 자유로이 머물면서, 누구와 이웃하여 속마음을 풀어낼까. 평생을 읊조렸지만 시짓기 아직 좋고, 여가에 바둑 두니 그 솜씨 또한 보배로다 . 온 나무에 폈던 꽃들 봄 지나 시들어도, 뜰 가득한 향그런 풀 빗속에 싱그럽다. 대나무 마주하고 두고두고 마실 터이니, 어느 누가 손님이고 어느 누가 주인일까. 갑신년(152 늦여름 강원감사 조방언(趙邦彦)1 차운하다 박광영(朴光榮 1463-153 원래 얽매인 사람1 아니었다고 자부하지만, 호해를 맘껏 즐기느라 다른 이웃은 없네. 혁추1처럼 한 백 년 바둑으로 몸소 즐거움 삼았고, 요(堯)1처럼 천 종의 술 마신들 값진 일은 못 됐네. 예전의 강문교엔 옛 모습 남아 있음을 알겠는데, 당시 수령의 거처1는 여전히 단청 빛이 새롭구나. 누구더러 기원(淇園)1의 정취를 자세히 물으랴. 오죽헌에 살았던 옛 분에게 물으면 되는 것을. 을유년(152 늦가을 강릉 부사 박광영(朴光榮) 차운하다 최세절(崔世節 1479-15320) 담 아래 감도는 구름가 옥 같은 몸 꼿꼿한데,2 높은 대나무 끝 제 홀로 구름서리와 이웃했네. 육천 명의 군자를2 세상 모두 우러르는데, 십만 명의 장부는2 나의 소중한 보배일세. 몸 봉양하는 사이 허다한 꽃잎사귀 고와지고, 주고 받는 술잔에 또다시 버들가지 새롭구나. 뜻대로 사는 한 백년 이런 게 즐거움이니, 신선 땅의 신선된들2 그 무엇에 쓰리오. 한가로이 자연에서 여유롭게 지내다보면, 청송과 녹죽을 함께 이웃 삼네. 오죽헌 온 경치에 늙어가도 진정 좋으리니, 만 곡(斛)의 진주라도 그리 보배가 아니리. 쇠잔해도 늙음 재촉하는 세월쯤은 아랑곳 않고, 짐짓 호기부려 생경한 인정세태 멋대로 사네. 산수의 즐거움 독차지한 남들을 부러워할 법한데, 하물며 나같이 동서남북 떠도는 벼슬아치임에랴.2 대나무 없으면 이 한 몸 속되게 하니, 위수 물가2 같은 대숲 천 이랑 좋은 이웃 되었네. 근심을 풀려고 호금 연주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고, 한가롭게 날을 보내며 보배처럼 좋은 술도 마시네. 펄럭 펄럭대는 변방의 깃발은 바람 끝에 어지럽고, 한점 한점의 검은 빛 산 모습은2 빗속에 또렷하니, 그 누가 동쪽의 좋은 땅을 거저 빼앗으려 하는가. 근심도 생각도 없는 이가 유덕한 사람인 것을. 계미년(152 봄 전(前) 승지(承旨) 최세절(崔世節)
  • 역주靑 : 1830년에 간행된 『관동지(關東誌)』에는 ‘胷’으로 되어 있어 번역문에서는 바로잡았다. ▨ : 내용과 잔획의 형태에 의거하여 ‘樂’으로 추정하였고, 번역문에 반영하였다. 撓 : 1830년에 간행된 『관동지(關東誌)』에는 ‘만(挽)’으로 되어 있다. ▨▨ : 1830년에 간행된 『관동지(關東誌)』에는 ‘吾所’로 되어 있어 번역문에서는 보충하였다. 旣 : 1830년에 간행된 『관동지(關東誌)』에는 ‘幾’로 되어 있어 번역문에서는 바로잡았다. 花 : 1830년에 간행된 『관동지(關東誌)』에는 ‘桃’로 되어 있다. 丘 : 1830년에 간행된 『관동지(關東誌)』에는 ‘邱’로 되어 있다. 罔 : 내용과 형태에 의거하여 ‘同’으로 추정하였고, 번역문에 반영하였다. ▨ : 내용과 잔획의 형태에 의거하여 ‘豪’로 추정하였고, 번역문에 반영하였다. 秋▨ : 내용과 잔획의 형태에 의거하여 ‘愁以’로 추정하였고, 번역문에 반영하였다. 1 ▨ : 내용과 잔획의 형태에 의거하여 ‘度’로 추정하였고, 번역문에 반영하였다. 1 ▨ : 내용과 잔획의 형태에 의거하여 ‘瑞’로 추정하였고, 번역문에 반영하였다. 1 ▨▨ : 내용과 잔획의 형태에 의거하여 ‘搖搖’으로 추정하였고, 번역문에 반영하였다. 1 조선 전기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빈지(贇之). 1523년부터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했다. 1 원문은 포계(匏繫)인데, 무용지물(無用之物)을 뜻하는 말이다. 『논어(論語)』 「양화(陽貨)」의 “내가 어찌 뒤웅박처럼 한 곳에 매달린 채 먹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겠는가.[吾豈匏瓜也哉。 焉能繫而不食]”라는 말에서 유래함. 1 추기(秋碁)는 혁추(奕秋)의 바둑이다. 혁추는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에 나오는 사람으로, 옛날에 바둑을 매우 잘 둔 사람이다. 1 공부(孔駙)의 『공총자(孔叢子)』에 따르면, “요(堯)와 순(舜)은 한 자리에서 천종(千鍾)의 술을 마셨고, 공자는 백고(百觚)의 술을 마셨다[堯舜千鍾 孔子百觚]”고 한다. 1 언실(偃室) : 지방 수령의 거처를 뜻함. 『논어』「옹야(雍也)」에, 자유(子游)가 담대멸명(澹臺滅明)의 아첨하지 않는 점을 칭찬하여 “한 번도 저 언(偃)의 집에 온 적이 없습니다.〔未嘗至於偃之室也〕”라고 한 데에서 유래함. 1 기원(淇園) : 옛날 위(衛)나라의 원림(園林) 이름으로, 대나무가 아주 많이 자라는 곳이다. 2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개지(介之). 호는 매창(梅窓). 공조판서 역임. 할아버지 치운(致雲), 아버지 형조참판 응현(應賢)과 함께 3대가 참판. 오죽헌 주인. 2 이하 이 시에서 묘사하는 대상은 모두 오죽헌의 대나무이다. 2 원문은 육천군자(六千君子)로, 대나무 숲을 가리킴. 2 원문은 십만장부(十萬丈夫)로, 대나무 숲을 가리킴. 두목(杜牧)의 「만청부(晚晴賦)」에 “대숲은 밖에서 둘러싼 십만의 장부 같아, 갑옷과 칼날 뒤섞여 빽빽이 빙 둘러 섰네.[竹林外裹兮十萬丈夫 甲刃樅樅密陳而環侍]”에서 유래함. 2 원문은 우화인(羽化人)으로 우화등선(羽化登仙)의 신선을 가리킨다. 굴원(屈原)의 「원유(遠遊)」에 “우인을 따라 단구에서 노닐고, 죽지 않는 옛 고장에 머물렀도다.[仍羽人於丹丘兮 留不死之舊鄕]”에서 유래함. 2 곡(斛)은 10말로, 1말은 부피로 약 18리터이며, 10되 혹은 100홉에 해당한다. 2 이 말은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지금 나는 동서남북으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다.〔今 丘也 東西南北之人也〕”라는 공자의 말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2 위수 물가는 옛날 강태공(姜太公)이 낚시질하던 곳인데, 여기서는 재덕(才德)을 갖춘 채 숨어사는 장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2 원문은 아환(鴉鬟)으로, 본래는 丫자 모양으로 가장귀지게 쪽진 여인의 검은 머리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검은 머리 빛의 산의 모양을 형용한 것이다. 아환(丫鬟)이라고도 쓴다.

현판(S09)

현판(S09
  • 원문栗谷先生贊 有英邁純異之姿。 有淸通正大之胸。 乎其致君澤民之志。 卓卓乎其繼往開來之功。 翶翔巖廊 則百僚瞻其瑞輝。 栖遲江湖 則四方薰其化風。 豁然天開而海濶。 皎然日光而玉潔。 豈不信三代上人物而爲諸儒宗耶。 後學安東金元行謹書。
  • 국문율곡선생찬 김원행(金元行 1702-177 뛰어나고 고매하며 순수하고 특출난 자질을 가지셨구나! 맑고도 탁트였으며 바르고 웅대한 심지(心地)를 품으셨구나! 간절하고 간절했네! 임금을 보좌해 성군을 만드시려 했던 뜻이여! 우뚝하고 우뚝했네! 옛 분들을 계승하고 후학들을 계도해주신 공적이여! 조정에선 여유로우셨기에 모든 관료들이 선생의 상서로운 광휘를 우러렀고, 강호에선 노닐며 쉬셨기에 사방의 백성들이 만물을 길러주시는 그 풍모에 감화되었네! 하늘이 활짝 열리니 바다가 활짝 펼쳐지듯, 태양이 눈부시게 비치니 옥이 깨끗하게 빛나듯 하셨으니, 하(夏)·은(殷)·주(周) 삼대(三代)에 사시던 분과 같아 모든 선비의 으뜸이 될 만하다는 말을 누군들 어찌 믿지 못하겠는가! 후학(後學) 안동(安東) 김원행(金元行)이 삼가 쓰다.
  • 번역율곡선생찬 김원행(金元行 1702-177 뛰어나고 고매하며 순수하고 특출난 자질을 가지셨구나! 맑고도 탁트였으며 바르고 웅대한 심지(心地)를 품으셨구나! 간절하고 간절했네! 임금을 보좌해 성군을 만드시려 했던 뜻이여! 우뚝하고 우뚝했네! 옛 분들을 계승하고 후학들을 계도해주신 공적이여! 조정에선 여유로우셨기에 모든 관료들이 선생의 상서로운 광휘를 우러렀고, 강호에선 노닐며 쉬셨기에 사방의 백성들이 만물을 길러주시는 그 풍모에 감화되었네! 하늘이 활짝 열리니 바다가 활짝 펼쳐지듯, 태양이 눈부시게 비치니 옥이 깨끗하게 빛나듯 하셨으니, 하(夏)·은(殷)·주(周) 삼대(三代)에 사시던 분과 같아 모든 선비의 으뜸이 될 만하다는 말을 누군들 어찌 믿지 못하겠는가! 후학(後學) 안동(安東) 김원행(金元行)이 삼가 쓰다.
  • 역주

현판(S10)

현판(S10
  • 원문敬題夢龍室 河山蓄氣降斯賢。 道德文章絶後前。 烏竹淸陰依舊日。 神龍吉夢應初年。 遺編不蠹親書字。 古硯曾濡侍講筵。 若使九京今可作。 泣歧後學得眞傳。 乙亥 仲夏 凝川 朴一和
  • 국문몽룡실에 공경히 적다 산하의 기운이 쌓여 이 현인 내셨으니, 도덕과 문장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으시네. 검은 대나무의 맑은 그림자는 여전히 옛날과 같고, 신령한 용을 꿈꾼 태몽이 그 젊은 시절의 일들과 부응한다네. 남기신 책에는 좀도 슬지 않아 손수 쓰신 글씨가 남아 있고, 적시셨던 옛 벼루는 임금 모시던 경연에서 쓰던 물건이네. 만약 구경(九京:묘지)에서 선생이 지금 일어나실 수만 있다면 갈림길에서 울고 있는 후학들이 참다운 가르침을 얻을 수 있으련만. 을해년 한여름에 응천(凝川) 박일화(朴一和)가 짓다.
  • 번역몽룡실에 공경히 적다 산하의 기운이 쌓여 이 현인 내셨으니, 도덕과 문장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으시네. 검은 대나무의 맑은 그림자는 여전히 옛날과 같고, 신령한 용을 꿈꾼 태몽이 그 젊은 시절의 일들과 부응한다네. 남기신 책에는 좀도 슬지 않아 손수 쓰신 글씨가 남아 있고, 적시셨던 옛 벼루는 임금 모시던 경연에서 쓰던 물건이네. 만약 구경(九京:묘지)에서 선생이 지금 일어나실 수만 있다면 갈림길에서 울고 있는 후학들이 참다운 가르침을 얻을 수 있으련만. 을해년 한여름에 응천(凝川) 박일화(朴一和)가 짓다.
  • 역주신사임당(申師任堂)이 율곡 이이를 낳을 때 검은 용의 출현을 태몽으로 꾸었는데, 율곡선생은 13세에 장원 급제를 한 이래로 모두 9번에 걸쳐 장원을 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렸다. 『회남자(淮南子)』에 따르면 옛날에 양주(楊朱)는 길을 가다 갈림길에서 울었다고 한다. 이는 선택에 따라 선악의 다른 종착지를 가게 되는 사람의 운명을 연상한 뜻이다.

현판(S11)

현판(S11
  • 원문烏竹軒重修記 옛날 周나라 召公이 막을 잠깐 쳤던 곳이라 거기 있는 아가위 나무 한가지도 꺽지 말라고 노래한 詩絶의 한 句節을 생각해보면 우리 民族의 스승이신 栗谷先生의 遺蹟地야 말로 얼마나 아끼고 위해야 할지 모른다 濊國의 古都 江原市北坪 竹軒洞에있는 烏竹軒은 栗谷先生의 誕生地인 同時에 또 그 어머님 師任堂申夫人의 誕生地이기도하다 先生이 여기서 났거늘 夢龍室이 어찌 尋常한 곳이며 또 여기서 거닐었거늘 어찌 옷깃을 가다듬지 않을것이랴 생각건대 四百年 동안에 이곳을 禮瞻한 이 실로 헤아릴수 없었고 또 이집을 修補하기도 一再에 그친바 아니었으나 오래 風雨에 저절로 頹落하여 보는 이마다 恐懼스러움을 禁하지 못했었다 그리하여 이번에 國家再建 最高會議 朴正熙 議長의 吩咐를 받들고 韓東錫 江陵市長의 協力을 얻어 이 집을 重修하는 同時에 先生의 높은 學問을 讚仰하고 또 그 救國濟民의 精神을 體得하고자 特히 本道에서는 栗谷祭 이름아래 年中行事를 마련하고 이 해로부터 그것을 實施하면서 삼가 여기 重修의 顚末을 적노라 西紀一九六二年十一月六日 江原道知事 李龍
  • 국문오죽헌중수기 이룡(李龍) 옛날 주(周)나라 소공(召公)이 장막을 잠깐 설치했던 곳이기 때문에 거기 있는 아가위 나무의 나뭇가지 하나조차 꺾지 말라고 노래한 『시경(詩經)』의 한 구절을 생각해보면 우리 민족의 스승이신 율곡(栗谷)선생의 유적지(遺蹟地)야말로 얼마나 아끼고 위해야 할지 모른다. 예국(濊國)의 고도(古都)인 강원시의 북평(北坪) 죽헌동(竹軒洞)에 있는 오죽헌(烏竹軒)은 율곡선생의 탄생지인 동시에 또 그 어머님 사임당(師任堂) 신부인(申夫人)의 탄생지이기도하다. 선생이 여기서 태어나셨으니 몽룡실(夢龍室)이 어찌 그저 심상(尋常)한 곳이 되겠으며, 또 여기서 선생이 거닐었으니 어찌 옷깃을 가다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생각건대 400년 동안에 이곳을 공경스럽게 바라다 본 사람이 실로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또 이 집을 수리한 것도 한두번에 그친 바가 아니었으나 오랜 동안 비바람에 저절로 퇴락(頹落)하여 보는 이마다 송구스러움을 금하지 못했었다. 그리하여 이번에 국가재건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분부를 받들고 한동석(韓東錫) 강릉시장의 협력을 얻어 이 집을 중수하는 동시에 선생의 높은 학문을 기리며 우러르고 또 그 구국제민(救國濟民)의 정신을 체득하고자 특히 우리 강원도에서는 율곡제(栗谷祭)라는 이름 아래 연중행사를 마련하고 이 해로부터 그것을 실시하면서 삼가 여기 중수의 전말을 적노라. 서기 1962년 11월 6일 강원도지사 이룡(李龍)
  • 번역오죽헌중수기 이룡(李龍) 옛날 주(周)나라 소공(召公)이 장막을 잠깐 설치했던 곳이기 때문에 거기 있는 아가위 나무의 나뭇가지 하나조차 꺾지 말라고 노래한 『시경(詩經)』의 한 구절을 생각해보면 우리 민족의 스승이신 율곡(栗谷)선생의 유적지(遺蹟地)야말로 얼마나 아끼고 위해야 할지 모른다. 예국(濊國)의 고도(古都)인 강원시의 북평(北坪) 죽헌동(竹軒洞)에 있는 오죽헌(烏竹軒)은 율곡선생의 탄생지인 동시에 또 그 어머님 사임당(師任堂) 신부인(申夫人)의 탄생지이기도하다. 선생이 여기서 태어나셨으니 몽룡실(夢龍室)이 어찌 그저 심상(尋常)한 곳이 되겠으며, 또 여기서 선생이 거닐었으니 어찌 옷깃을 가다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생각건대 400년 동안에 이곳을 공경스럽게 바라다 본 사람이 실로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또 이 집을 수리한 것도 한두번에 그친 바가 아니었으나 오랜 동안 비바람에 저절로 퇴락(頹落)하여 보는 이마다 송구스러움을 금하지 못했었다. 그리하여 이번에 국가재건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분부를 받들고 한동석(韓東錫) 강릉시장의 협력을 얻어 이 집을 중수하는 동시에 선생의 높은 학문을 기리며 우러르고 또 그 구국제민(救國濟民)의 정신을 체득하고자 특히 우리 강원도에서는 율곡제(栗谷祭)라는 이름 아래 연중행사를 마련하고 이 해로부터 그것을 실시하면서 삼가 여기 중수의 전말을 적노라. 서기 1962년 11월 6일 강원도지사 이룡(李龍)
  • 역주주나라 문왕(文王)의 아들이자 무왕(武王)의 동생인 희석(姬奭). 주 문왕(周文王) 때 소공은 감당(甘棠) 아래에 거주하며 남국(南國)에 교화를 밝혔다고 한다. 『시경』 소남(召南)편의 「감당(甘棠)」이라는 작품을 가리킨다. 남국(南國)의 백성들이 선정(善政)에 감동하여 그가 머물고 쉬었던 감당나무를 소중히 여겨서 자르지도 말고 베지도 말게 했다.

현판(S12)

현판(S12
  • 원문烏竹軒重修記 슬기로운 祖上은 겨레의 빛이요 蒼然한 古蹟은 國土의 꽃 무늬다 여기 江陵의 烏竹軒은 이 빛과 꽃 무늬를 함께한 곳으로 우리나라가 아름답고 그 歷史가 오래다 하나 이만치 가춘 곳은 그리 흔하지 아니하다 이 곳은 學行이 東方에 뛰어나 一世의 師表로 우러름을 받는 李栗谷先生이 나신 곳 일뿐 아니라 古今에 그 才德을 짝할이 없는 先生의 어머니 申師任堂이 나신 곳이며 先生의 母子분의 手澤 머물은 遺品들이 保藏되어 있는 由緖깊은 곳이다 얼마前 朴正熙 大統領께서 이곳에 오셨다가 두루 살피시고 이 뜻있는 史蹟들을 더욱 온전하게 保存하라는 吩咐와 下賜金을 내리셨기에 金亨起 江陵市長의 協力을 얻어 烏竹軒을 重修하고 兼하여 栗谷先生의 姨從이었던 勸處均의 胤嗣인 現管理人의 住宅을 다시 손질하는 한편 記念館에 새로 遺品陳列欌을 곱게 만들어 그 保全을 期하는 일을 마치고 여기 이 일의 大綱을 삼가 적는다 西紀 一九六八年九月 日 江原道知事 朴敬遠
  • 국문오죽헌중수기 박경원(朴敬遠) 슬기로운 조상(祖上)은 겨레의 빛이요 창연(蒼然)한 고적(古蹟)은 국토의 꽃무늬이다. 여기 강릉(江陵)의 오죽헌은 이 빛과 꽃무늬를 함께한 곳으로 우리나라가 아름답고 그 역사가 오래다 하나 이만치 갖춘 곳은 그리 흔하지 아니하다. 이곳은 학문과 실천이 우리나라에서 뛰어나 한 시대의 스승으로 우러름을 받는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이 태어나신 곳 일뿐만 아니라 고금(古今)에 그 재덕(才德)을 비교할 수 없는 율곡선생의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이 태어나신 곳이며 율곡선생 모자(母子)분의 손길이 머문 유품(遺品)들이 보관되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얼마 전 박정희 대통령께서 이곳에 오셨다가 두루 살피시고 이 뜻있는 사적(史蹟)들을 더욱 온전하게 보존하라는 분부(吩咐)와 하사금(下賜金)을 내리셨기에 김형기(金亨起) 강릉시장의 협력을 얻어 오죽헌을 중수하고 겸하여 율곡선생의 이종사촌이었던 권처균(勸處均)의 종손(宗孫)인 현재 관리인(管理人)의 주택을 다시 손질하는 한편 기념관에 새로 유품 진열장을 곱게 만들어 잘 보전하도록 하는 일을 마치고 여기 이 일의 대강(大綱)을 삼가 적는다. 서기 1968년 9월 어느 날 강원도지사 박경원(朴敬遠)
  • 번역오죽헌중수기 박경원(朴敬遠) 슬기로운 조상(祖上)은 겨레의 빛이요 창연(蒼然)한 고적(古蹟)은 국토의 꽃무늬이다. 여기 강릉(江陵)의 오죽헌은 이 빛과 꽃무늬를 함께한 곳으로 우리나라가 아름답고 그 역사가 오래다 하나 이만치 갖춘 곳은 그리 흔하지 아니하다. 이곳은 학문과 실천이 우리나라에서 뛰어나 한 시대의 스승으로 우러름을 받는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이 태어나신 곳 일뿐만 아니라 고금(古今)에 그 재덕(才德)을 비교할 수 없는 율곡선생의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이 태어나신 곳이며 율곡선생 모자(母子)분의 손길이 머문 유품(遺品)들이 보관되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얼마 전 박정희 대통령께서 이곳에 오셨다가 두루 살피시고 이 뜻있는 사적(史蹟)들을 더욱 온전하게 보존하라는 분부(吩咐)와 하사금(下賜金)을 내리셨기에 김형기(金亨起) 강릉시장의 협력을 얻어 오죽헌을 중수하고 겸하여 율곡선생의 이종사촌이었던 권처균(勸處均)의 종손(宗孫)인 현재 관리인(管理人)의 주택을 다시 손질하는 한편 기념관에 새로 유품 진열장을 곱게 만들어 잘 보전하도록 하는 일을 마치고 여기 이 일의 대강(大綱)을 삼가 적는다. 서기 1968년 9월 어느 날 강원도지사 박경원(朴敬遠)
  • 역주

현판(S13)

현판(S13
  • 원문行過臨瀛。望見鏡浦。忙遽未得登覽。漫吟一絶。奉呈權仲信案下。 鑑湖自在眞仙宅。 瀛海稽山較孰長。 聖代如今應有詔。 不知誰是賀知章 鄭仲淳 滄溟空濶嶺岧。 萬古三光蔚未凋。 淑氣儲精初孕傑。 豫章出地已昻霄。 適來似爲文玆在。 運去爭如道自消。 古宅抵今徵闕里。 遺風未覺百年遙。 乙未秋。鄭羲河。
  • 국문정호(鄭澔 1648-173 임영(臨瀛:강릉) 땅을 지나가다 멀리서 경포대(鏡浦臺)를 바라보았다. 갈 길이 바쁘고 급했기에 올라가 둘러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부질없이 시 한수만 지어 권중신(權仲信)의 안하(案下)에 받들어 보낸다. 감호야 본디 진짜 신선의 집이라지만 임영(臨瀛:강릉)의 앞 바다를 회계산(會稽山)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나을까 지금같은 태평성대에 응당 조서(詔書)가 있을 터이니 그때는 누가 하지장인지 모르겠구나 정중순(鄭仲淳)이 짓다. 동해바다는 광활하고 대관령은 높은데, 만고토록 해, 달, 별의 밝은 빛 시들지 않네. 맑은 기운이 정기를 모아 비로소 인걸을 잉태하니, 예장 땅이 우뚝 솟아 모두들 이미 우러른다네. 때마침 이곳에 나셔서 문(文)이 있게 된 성 싶었는데1, 운이 다하니 도(道)가 소멸하는 것을 어찌할 것인가?1 오래된 오죽헌이 지금도 남아 궐리(闕里)1를 징험하게 하니, 남겨주신 풍도에 돌아가신 지난 백년이 먼 옛날 같지 않네. 을미년(171 가을 정희하(鄭羲河 1681-1741가 짓다.
  • 번역정호(鄭澔 1648-173 임영(臨瀛:강릉) 땅을 지나가다 멀리서 경포대(鏡浦臺)를 바라보았다. 갈 길이 바쁘고 급했기에 올라가 둘러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부질없이 시 한수만 지어 권중신(權仲信)의 안하(案下)에 받들어 보낸다. 감호야 본디 진짜 신선의 집이라지만 임영(臨瀛:강릉)의 앞 바다를 회계산(會稽山)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나을까 지금같은 태평성대에 응당 조서(詔書)가 있을 터이니 그때는 누가 하지장인지 모르겠구나 정중순(鄭仲淳)이 짓다. 동해바다는 광활하고 대관령은 높은데, 만고토록 해, 달, 별의 밝은 빛 시들지 않네. 맑은 기운이 정기를 모아 비로소 인걸을 잉태하니, 예장 땅이 우뚝 솟아 모두들 이미 우러른다네. 때마침 이곳에 나셔서 문(文)이 있게 된 성 싶었는데1, 운이 다하니 도(道)가 소멸하는 것을 어찌할 것인가?1 오래된 오죽헌이 지금도 남아 궐리(闕里)1를 징험하게 하니, 남겨주신 풍도에 돌아가신 지난 백년이 먼 옛날 같지 않네. 을미년(171 가을 정희하(鄭羲河 1681-1741가 짓다.
  • 역주원문에는 ‘秪’이지만, ‘抵’의 오자이다.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중순(仲淳). 호는 장암(丈巖). 정철(鄭澈)의 현손이며, 송시열의 문인. 신임사화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삼척부사 및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역임. 시호는 문경(文敬)임. 당시 오죽헌의 주인이었던, 권처균의 현손(玄孫)인 권윤재(權允載)로 보인다. 권윤재는 삼척부사로 있던 정호(鄭澔)를 방문하여 「오죽헌중수기(烏竹軒重修記)」의 글을 지어달라고 부탁한 바도 있다. 원래 의미는 ‘책상 아래’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수신자를 높이는 표현으로 쓰였다. 감호는 경호(鏡湖)와 같은 말로, 소흥현(紹興縣)에 있는 호수 이름이다. 당 현종(唐玄宗) 때 비서감(祕書監) 하지장(賀知章)이 사직하고 돌아가자, 현종이 그에게 경호의 한 굽이를 하사했다. 회계산은 풍광이 아름다운데, 이 역시 감호가 있는 소흥현(紹興縣)에 있기에 강릉의 경치와 비교하는 대상으로 언급되었다. 하지장(賀知章)을 신임하고 감호를 하사했던 당 현종(唐玄宗)처럼, 정호의 이 시를 받는 오죽헌 주인에게도 어진 임금님의 조서가 내려지리라는 덕담이다. 당나라 때 문인 관료. 자는 계진(季眞). 성격이 활달하고 문장과 글씨를 잘 쓰고 술도 좋아했다. 중년에 벼슬길에 올랐으나 노년에 벼슬을 버리고 사명광객(四明狂客)이라 자칭하고 은거했다. 중순(仲淳)은 정호의 자(字)이다. 예장은 원래 중국 한나라 때 현재의 강서성(江西省)에 설치했던 군(郡)으로 위의 시에서 언급한 감호나 회계산과 가깝다. 여기서는 강릉을 가리키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1 해, 달, 별의 정기를 모아 율곡(栗谷) 이이(李珥)이 풍광 좋은 이곳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남을 가리킨다. 1 율곡 이이의 죽음을 말한 구절이다. 1 공자가 태어난 고향이 산동성 곡부의 궐리이다. 여기서는 궐리가 남아 있어 공자의 탄생을 얘기하듯, 오죽헌이 남아 있어 율곡선생의 탄생을 기릴 수 있다는 내용이다. 1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성서(聖瑞), 호는 취석당(醉石堂)이다. 송강 정철(鄭澈)의 6세손으로 영의정을 지낸 문경공 정호(鄭澔)와 강릉최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현판(S14)

현판(S14
  • 원문烏竹軒 庚寅仲春 遺軒丹雘儼岧嶤。 庭籜生孫翠不凋。 間氣玄龍初出海。 斯文瑞鳳已藏霄。 須知夫子時來去。 只係偏邦運長消。 信是炳靈開別局。 八窓收納鏡湖遙。 儒賢所出大瀛濱。 故老相傳孟氏隣。 是母眞能生是子。 斯文何幸有斯人。 咿唔竹裏硏經夕。 匍匐祠前禱疾晨。 几閣猶留要訣草。 試看心畫捴精神。 金子益 湖上岧嶤聳翠亭。 絳帷零落襲餘馨。 龍飛東海驚神夢。 麟獲西郊泣斷經。 蒙訣埋塵纔出壁。 老筠和雨尙交庭。 試尋杖屨盤旋處。 雲瀑深深洞鶴靑。 道東千載有眞賢。 洙泗淸波鏡水連。 功用魯邦觀一變。 淵源鄒母費三遷。 濕雲不散龍歸洞。 遙海無邊月到天。 花石石潭皆晩遯。 胚胎應藉此山川。 李子東 中華人見先生四柱。 但題唐人詩一句曰。龍歸曉洞雲猶濕 麝過春山草自香。
  • 국문오죽헌 경인년(17 중춘(仲春)에 짓다 김창흡(金昌翕 1653-172 붉은 빛 엄숙한 오죽헌은 우뚝하게 남아 있는데 뜰의 대나무는 나고 또 나서 푸른빛이 여전하네. 기상이 특출난 검은 용은 처음 바다를 나섰건만 유학의 상서로운 봉황은 어느새 하늘에 숨었구나. 선생이 오고 가신 시운(時運)을 알아야만 하나니 변방 나라 흥망성쇠의 운수가 달려있기 때문이라. 이곳은 실로 신령한 기운이 열어 놓은 별세계인데 오죽헌이 팔방의 창문으로 먼 경포호를 받아들이네. 유현이 나신 임영(臨瀛:강릉)의 큰 바닷가 노인들은 맹자가 이웃을 고른 일을 서로 전하네. 이 같은 어머니가 실로 이 같은 아드님을 나셨으니 이 학문에 이런 분이 계신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대숲 속의 독서 소리는 경전 익히는 저녁의 풍경 사당 앞에 엎드림은 모친의 쾌유 비는 새벽의 모습 책시렁에 『격몽요결』의 초고본이 아직 남아있으니 정신이 응결된 그 책의 한 자 한 자를 한번 보시게. 김자익(金子益) 이해조(李海朝 1660-1711 호숫가 우뚝하게 솟은 푸른 빛 정자에는 붉은 휘장1 낡았어도 남은 향이 느껴지네. 용이 동해에서 날아오니 신묘한 꿈에 놀랬고1 기린이 서교에서 잡혀 경전이 끊어짐에 울었네.1 격몽요결은 먼지에 묻혔다가 이제 벽에서 나오고 묵은 대나무는 비와 어울려 여전히 뜨락에 우거졌네. 시험 삼아 선생이 노니시던 곳을 찾아보니 깊디깊은 구름 폭포 속 푸른 학이 노니는 곳이리. 도가 동쪽으로 온지 천 년 만에 참된 현자를 얻으니 수사의 맑은 물결이 경포호로 이어졌네. 노나라를 한번 변하게 할 만한 공적을 이루었고1 맹모삼천(孟母三遷)의 어머니를 스승으로 삼았네.1 젖은 구름 흩어지지 않아 용이 골짜기로 돌아가니1 먼 바다는 끝이 없고 달만 중천에 이르렀네. 화석정이나 석담이 모두 만년의 은거지 였어도 잉태한 기운만은 응당 이 산천에 힘입었으리. 이자동(李子東) 중화(中華)의 사람이 율곡 선생의 사주(四柱)를 보고서는 다만 당나라 사람의 한 시구를 다음과 같이 적어주었다고 한다. “용이 돌아간 새벽 골짜기엔 구름 아직 젖어있고, 사향노루 지나간 봄 동산은 풀만 절로 향기롭구나”
  • 번역오죽헌 경인년(17 중춘(仲春)에 짓다 김창흡(金昌翕 1653-172 붉은 빛 엄숙한 오죽헌은 우뚝하게 남아 있는데 뜰의 대나무는 나고 또 나서 푸른빛이 여전하네. 기상이 특출난 검은 용은 처음 바다를 나섰건만 유학의 상서로운 봉황은 어느새 하늘에 숨었구나. 선생이 오고 가신 시운(時運)을 알아야만 하나니 변방 나라 흥망성쇠의 운수가 달려있기 때문이라. 이곳은 실로 신령한 기운이 열어 놓은 별세계인데 오죽헌이 팔방의 창문으로 먼 경포호를 받아들이네. 유현이 나신 임영(臨瀛:강릉)의 큰 바닷가 노인들은 맹자가 이웃을 고른 일을 서로 전하네. 이 같은 어머니가 실로 이 같은 아드님을 나셨으니 이 학문에 이런 분이 계신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대숲 속의 독서 소리는 경전 익히는 저녁의 풍경 사당 앞에 엎드림은 모친의 쾌유 비는 새벽의 모습 책시렁에 『격몽요결』의 초고본이 아직 남아있으니 정신이 응결된 그 책의 한 자 한 자를 한번 보시게. 김자익(金子益) 이해조(李海朝 1660-1711 호숫가 우뚝하게 솟은 푸른 빛 정자에는 붉은 휘장1 낡았어도 남은 향이 느껴지네. 용이 동해에서 날아오니 신묘한 꿈에 놀랬고1 기린이 서교에서 잡혀 경전이 끊어짐에 울었네.1 격몽요결은 먼지에 묻혔다가 이제 벽에서 나오고 묵은 대나무는 비와 어울려 여전히 뜨락에 우거졌네. 시험 삼아 선생이 노니시던 곳을 찾아보니 깊디깊은 구름 폭포 속 푸른 학이 노니는 곳이리. 도가 동쪽으로 온지 천 년 만에 참된 현자를 얻으니 수사의 맑은 물결이 경포호로 이어졌네. 노나라를 한번 변하게 할 만한 공적을 이루었고1 맹모삼천(孟母三遷)의 어머니를 스승으로 삼았네.1 젖은 구름 흩어지지 않아 용이 골짜기로 돌아가니1 먼 바다는 끝이 없고 달만 중천에 이르렀네. 화석정이나 석담이 모두 만년의 은거지 였어도 잉태한 기운만은 응당 이 산천에 힘입었으리. 이자동(李子東) 중화(中華)의 사람이 율곡 선생의 사주(四柱)를 보고서는 다만 당나라 사람의 한 시구를 다음과 같이 적어주었다고 한다. “용이 돌아간 새벽 골짜기엔 구름 아직 젖어있고, 사향노루 지나간 봄 동산은 풀만 절로 향기롭구나”
  • 역주원문은 간기(間氣)인데, 『삼연집(三淵集)』에도 ‘간기(間氣)’로 되어 있다. 다만, 1830년에 간행된 『관동지(關東誌)』에는 ‘기감(氣感)’으로 되어 있다. 원문은 이오(咿唔)인데 : 『삼연집(三淵集)』에는 “이오(伊吾)”로 되어 있다. 뜻에는 차이가 없다. 원문의 관(觀)은 1830년에 간행된 『관동지(關東誌)』에도 ‘관(觀)’으로 되어 있다. 다만, 『명암집(鳴巖集)』에만 ‘기(期)’로 되어 있다. 현판에는 ‘불(不)’과 ‘산(散)’사이에 ‘변변(變 〃)’이 있으나 불필요한 글자이넫 잘못 보태진 경우이다. 『명암집(鳴巖集)』과 1830년에 간행한 『관동지(關東誌)』에도 모두 ‘변변(變 〃)’이 없다. 원문의 둔(遯)은 1830년에 간행된 『관동지(關東誌)』에도 ‘둔(遯)’으로 되어 있고, 『명암집(鳴巖集)』에만 ‘적(迹)’으로 되어 있다. 김창흡(金昌翕)의 문집인 『삼연집(三淵集)』에는 제목이 「강릉오죽헌(江陵烏竹軒) 율곡소생지(栗谷所生地)」라고 되어 있다. 신사임당의 꿈에 검은 용이 동해로부터 날아와, 방 처마 밑 문 머리에 서렸다고 한다. 꿈에서 깨어 율곡을 낳아 이름을 '현룡(見龍)’이라 하고, 그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고 했다. 따라서 여기서 검은 용의 출현은 율곡의 탄생을 상징한다. 율곡 선생의 죽음을 의미한다. 율곡 선생이 5세 때에 신사임당이 위독한 적이 있었는데 율곡 선생이 남모르게 외할아버지 사당(祠堂)에 들어가 기도를 드렸다. 그의 이모가 마침 지나가다가 보고 경탄하고 그를 달래어 마음을 풀어 주고 안고서 돌아왔다고 한다. 김장생의 「율곡행장」을 참조. 자익(子益)은 김창흡의 자(字)이다. 김창흡의 호는 삼연(三淵) 혹은 낙송자(洛誦子)이다. 1 이해조 (李海朝 1660-171 호는 명암(鳴巖)이다. 1 강유(絳帷)는 붉은 휘장이란 뜻으로 스승의 자리를 의미한다. 중국 후한의 마융(馬融)이 항상 고당(高堂)에 앉아 붉은 비단 휘장을 드리우고 강의했던 것에서 유래했다. 여기서는 율곡 선생의 죽음을 환기하는 표현이다. 1 신사임당의 태몽을 의미한다. 신사임당은 검은 용이 동해로부터 날아오는 꿈을 꾸고 율곡을 낳았다. 1 원문의 단경(斷經)은 공자(孔子)의 절필을 의미하지만, 여기선 위대한 스승의 죽음 곧 율곡의 죽음이란 의미이다. 실제로 율곡 선생은 해동(海東)의 공자(孔子)라 불렸다. ‘단경(斷經)’은 『춘추(春秋)』에서 ‘노애공(魯哀公) 14년 봄에 서쪽에서 사냥하다가 기린을 잡았다[西狩獲麟].’의 구절에서 공자가 집필을 멈춘 것에서 유래했다. 1 수사(洙泗)는 중국 산동성에 흐르는 물인 수수(洙水)와 사수(泗水)이다. 수수는 북쪽에 있고, 사수는 남쪽에 있는데 공자의 고향인 곡부(曲阜)를 지난다. 공자는 수수와 사수 사이에서 문도를 모아 가르쳤기에, 여기서는 공자를 의미한다. 1 ‘제나라가 한번 변하면 노나라가 될 수 있고, 노나라가 한번 변하면 도(道)에 이를 수 있다’고 한 『논어(論語)』의 구절을 빌어 율곡선생이 나라를 도에 이르게 한 공적이 있음을 칭송한 것이다. 1 맹모삼천(孟母三遷)의 어머니란 신사임당을 가리킨다. 1 오죽헌 어제각에 보관된 정조 어필의 벼루에도 비슷한 표현이 보인다. ‘용은 동천(洞天)으로 돌아갔건만, 구름은 먹을 뿌려 학문이 여기에 남았구나!(龍歸洞 雲潑墨 文在玆)’ 여기서 용(龍)은 율곡 선생을 가리킨다. 1 자동(子東)은 이해조 (李海朝 1660-171의 자(字)이다. 20) 율곡 설화에 따르면 율곡 선생이 어릴 적 꿈에서 하늘사람에게 금빛 첩지를 받았는데 그 내용이 ‘용귀효동운유습(龍歸曉洞雲猶濕) 사과춘산초자향(麝過春山草自香)’이었다고도 한다.

현판(S15)

현판(S15
  • 원문謹次淵翁韻 商山山色久岧嶤。 叢竹蕭森碧未凋。 奴隸亦能知白日。 古今誰不仰雲霄。 生千一運文宣朗。 經數百年道漸消。 當夜夢龍猶有室。 尤溪之水溯源遙。 宋秉璿
  • 국문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옹의 시에 삼가 차운하다 송병선(宋秉璿 1836-190 상산의 산 빛은 오래도록 높고 높은데 대나무 줄기들은 빽빽한 채 아직 푸르네. 머슴이라도 능히 백일처럼 알고 있으니 고금토록 그 누가 하늘처럼 우러르지 않으랴. 천에 하나 운수를 틔워 문장이 뚜렷했지만 수백 년 경과하며 도덕이 점점 잊혀졌구나. 그날 밤 용을 태몽으로 꾼 집이 아직 있어 우계의 원류로까지 멀리 거슬러 올라가네. 송병선(宋秉璿)
  • 번역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옹의 시에 삼가 차운하다 송병선(宋秉璿 1836-190 상산의 산 빛은 오래도록 높고 높은데 대나무 줄기들은 빽빽한 채 아직 푸르네. 머슴이라도 능히 백일처럼 알고 있으니 고금토록 그 누가 하늘처럼 우러르지 않으랴. 천에 하나 운수를 틔워 문장이 뚜렷했지만 수백 년 경과하며 도덕이 점점 잊혀졌구나. 그날 밤 용을 태몽으로 꾼 집이 아직 있어 우계의 원류로까지 멀리 거슬러 올라가네. 송병선(宋秉璿)
  • 역주久 : 『연재선생문집(淵齋先生文集)』에는 ‘遠’으로 되어 있다. 叢 : 『연재선생문집(淵齋先生文集)』에는 ‘嚴’으로 되어 있다. 溯 : 『연재선생문집(淵齋先生文集)』에는 ‘泝’로 되어 있다. 중국 진(秦) 나라 말기에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네 사람의 은자가 은거했던 산이다. 그 은자는 상산사호(商山四皓) 즉, 동원공(東園公),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 기리계(綺里季) 등이다. 『연재선생문집(淵齋先生文集)』에 따라 ‘久’를 ‘遠’으로 읽으면 ‘저 멀리’로 번역된다. 『연재선생문집(淵齋先生文集)』에 따라 ‘叢’을 ‘嚴’으로 읽으면 ‘엄숙한 대나무들’로 번역된다. 우계(尤溪)는 주자(朱子)를 가리킨다. 주자는 중국 남송(南宋) 건염(建炎) 4년(1130) 3월 15일 오시(午時)에 복건(福建) 남검주(南劍州, 지금의 南平) 우계현(尤溪縣)의 의재(義齋) 정안도(鄭安道)의 별장에서 태어났다.

현판(S16)

현판(S16
  • 원문眞珠去路 謹次淵翁韻 寄烏竹軒主人 海無涯岸山岧嶤。 間氣百年草木凋。 神物炳靈徵夢寐。 奎躔會彩廓雲霄。 半庭淇竹靑仍老。 一片陶泓澤未消。 世運卽今蕭颯盡。 周天殘日鳳獜遙。 李最中
  • 국문진주(眞珠)로 가는 길에 연옹(淵翁)의 시에 삼가 차운하여 오죽헌(烏竹軒) 주인에게 부친 시 이최중(李最中 1715-178 끝없는 바다와 우뚝한 산이 있는 이곳에 웅대했던 그 기상도 백 년만에 초목마저 시들었네. 신령한 물건의 빛나는 영기(靈氣)가 꿈에 감응하니, 규전의 모인 광채가 하늘에 환하였네. 뜰 가운데 기수(淇水)의 대나무는 푸르른 채 늙어 가는데, 한 조각 도홍에는 손때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구나. 세상 운수가 지금에 모두 쓸쓸한데, 주나라의 하늘에 해가 지건만 봉린(鳳獜)은 멀리 있구나. 이최중(李最中)
  • 번역진주(眞珠)로 가는 길에 연옹(淵翁)의 시에 삼가 차운하여 오죽헌(烏竹軒) 주인에게 부친 시 이최중(李最中 1715-178 끝없는 바다와 우뚝한 산이 있는 이곳에 웅대했던 그 기상도 백 년만에 초목마저 시들었네. 신령한 물건의 빛나는 영기(靈氣)가 꿈에 감응하니, 규전의 모인 광채가 하늘에 환하였네. 뜰 가운데 기수(淇水)의 대나무는 푸르른 채 늙어 가는데, 한 조각 도홍에는 손때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구나. 세상 운수가 지금에 모두 쓸쓸한데, 주나라의 하늘에 해가 지건만 봉린(鳳獜)은 멀리 있구나. 이최중(李最中)
  • 역주삼척부의 관사인 진주관(眞州館)을 가리킨다. 관동팔경의 하나로 보물 213호인 죽서루(竹西樓)가 바로 이 진주관의 부속건물이다. 이 시는 1756년 이후 삼척부사로 부임하며 지은 시로 추정된다. 김창흡(1653-172. 자 자익(子益), 호 삼연(三淵). 시호 문강(文康). 영의정 김수항의 아들, 창집의 아우. 이단상(李端相)의 제자로 진사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버렸다. 형제들과 함께 명망이 높았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 인부(仁夫), 소자(小字)·계량(季良). 호 위암(韋庵). 시호 문정(文貞). 1756년 강원도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고 후에 삼척부사(三陟府使) 등을 역임했다. 『위암집』이 전한다. 신사임당(申師任堂)이 율곡 이이를 낳을 때 검은 용의 출현을 태몽으로 꾸었다 해서, 그 사연이 오죽헌에 있는 ‘몽룡실(夢龍室)’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규전은 규수(奎宿)이다.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의 5성이 서방(西方)의 규수에 한꺼번에 출현하여 문채가 빛났다는 말인데, 규수는 예로부터 문운(文運)을 주관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시경』 ‘위풍(衛風)’의 작품인 「기욱(淇奧)」에 첫머리에 “저 기수 물굽이를 굽어다 보니, 푸른 대나무가 무성하도다.”한 것을 인용한 표현이다. 오죽헌에 뒤뜰에 심긴 대나무를 가리킨다. ‘도홍’은 벼루인데, 이는 한유(韓愈)가 「모영전(毛穎傳)」을 지으면서, 문방사우(文房四友)에 대해서 각각 붓은 관성자(管城子), 먹은 진현(陳玄), 종이는 저선생(楮先生)으로 의인화할 때 쓴 표현이다. 오죽헌 어제각에는 율곡선생이 사용하던 벼루가 보관되어 있는데, 그 벼루에 율곡선생의 손길이 닿았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음을 의미한다. 명나라가 망하여 성현(聖賢)의 도가 사라져 가는데, 이런 상황을 타개할 훌륭한 인물이 지금은 없다는 의미이다.

현판(S17)

현판(S17
  • 원문烏竹軒重修上梁文 咺赫盛德之不諼。 衛詩詠猗猗之竹。 似續築室之有覺。 周雅頌秩秩之干。 人士改觀。 草木若賁。 念茲竹軒之故主。 實是栗翁之外家。 鏡水之仙庄卜幽。 名區得此君之所。 東陽之世德傳美。 賢女肖乃翁之風。 林居讓弓㫌之招。 韻恊玄竿之標格。 閨藝爛藻繪之妙。 光暎碧牕之琅玕。 猗歟淑德之所胚胎。 奄與間氣而俱磅礴。 湖山炳煥。 名門占宅相之徵。 天地氤氳。 大東啓人文之運。 雲霞絢彩。 縹緲素娥之呈祥衡斗揚靈恍惚玄龍之協夢乃丙申咸臨之月而大賢震生于兹清粹自降世之初。 孝著爲慈母禱。 道德驗發軔之日。 志欲與聖人齊。 溯洛閩而闢一理之原。 炳若靈蓍明燭。 揚朝廷而儼三代之像。 昭乎瑞鳳祥獜。 文敎之繼開無窮。 何人不仰山斗。 心畵之筆削有訣。 遺几尙留精神。 是以鄒黌說孟母之隣。魯嶽想孔聖之誕。 彤軒翼其依舊。 僾然杖屨之如臨。 翠籜挺而不凋。 展也樹木之猶惜百年之愛護彌篤在他人而尚然奕世之紹述斯存矧後裔而可忽主人權斯文 粤自申氏而傳玆宅。 盖與先生而同彌甥。 派並自於淸源。 洋洋餘澤之相襲。 風猶敦於故閥。 綿綿遺業之是繩。 巋然棟桷之恒瞻。 撫年代而興感。 久矣風雨之剝落。 念堂搆而增嗟。 乃眷海郵之仙官。 適是石潭之華胄。 悠悠契愴先之念。 與相周諮。 款款恊弼基之謀。 爰共荒度。 山精助力斧。 文梓而撑梁。 海若輸靈鞭。 叢石而補砌。 肆堂室規制之因其舊。 惟材瓦腐缺之易以新。 朱栱賁雲招搖出人寰之表。 碧牖臨海突兀抗仙闕之高。 環庭之舊植栽培。 箇箇雪霜之節。 連屋之遺書整頓。 卷卷聖賢之心。 山高水長而仰其風。 地闢天開而見此屋。 同多士爰居爰處。 洋耳續絃誦之音。 念君子攸芋攸躋。 寓目起羹墻之慕。 淸香薰秩。 想像硏經之辰。 綠筠蔭牀。 髣髴懸弧之所。 於斯生於斯長。 詎徽躅之可忘。 有是母有是兒。 信遺光之必遠。 門墻煥前脩之址。 庶期不騫不崩。 椽約藹後人之誠。 是謂善繼善述。 可但寓桑梓之敬。 抑亦致菁莪之興。 明湖是瞻。 地欲接洙泗之派。 新搆方屹。 時則屬舞雩之春。 嶺左衣冠競變豹而趋仰。 海上鸞鵠同賀燕而來儀。 信美如竹之苞。 宜颺秉管之頌。 兒郞偉抛梁東。 海日初生竹影中。 想得宗師心法在。 朝朝提掇皦光同。 兒郞偉抛梁南。 迢遆丘山聳彩嵐。 下有宮墻夫子像。 精神烱烱搖相參。 兒郞偉抛梁西。 竹林明月嶺頭低。 隱屛千里憐同照。 夜夜光分九曲溪。 兒郞偉抛梁北。 楓嶽雪山來翼翼。 一氣仙區開炳靈。 獜文寶彩譪堂閾。 兒郞偉抛梁上。 斗極中天星共向。 後學亦知師道尊。 千途咸湊一原曠。 兒郞偉抛梁下。 瀲瀲湖光生遠野。 當日竹欄存妙詮。 雲天有象鏡中寫。 伏願上梁之後。 千劫永固 萬靈共扶。 葆光於一室之中。 家傳讀書種子。 聞風於百世之下。 士知爲學根基。 譬如立志立身。 可觀感於斯竹。 瞻之在前在後。 常對越於茲堂。 庶徵無彊之惟休。 盍念有爲者亦若。 崇禎紀元後三丙戌仲春。 後學驪興閔百順謹述。 文旣成而後十七年壬寅。軒始重修。揭之。
  • 국문오죽헌중수상량문 烏竹軒重修上梁文 민백순(閔百順 1711-177 빛나고 의젓한 훌륭한 인품을 잊지 못하겠다고 한 것은 『시경(詩經)』의 위(衛)나라 시에서 ‘무성한 대나무’를 노래한 구절이고, 조상의 뜻을 이어 기둥이 쭉쭉 뻗은 집을 짓겠다고 한 것은 『시경(詩經)』의 주(周)나라 시에서 ‘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노래한 구절이다. 오죽헌을 중수하니 인사(人士)들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초목(草木)이 화려하게 광채가 나는 듯하다. 생각해보면 이 오죽헌의 옛 주인은 실로 율곡선생의 외가이네. 거울 같은 호숫가 신선 사는 집에 터를 잡아, 명승(名勝)의 땅을 얻으니 대나무 있는 이 곳이고, 동쪽 땅 양지 바른 곳에 대대로 내려오는 아름다운 덕(德)을 전하니, 현명한 어머니를 닮으신 바로 율곡옹의 풍모(風貌)이다. 산림에 은거하며 활과 깃발의 초빙도 사양하고, 검은 대나무의 곧은 풍모와 운치 있게 조화를 이루었네. 규방의 예술은 그림에 익숙한 솜씨이니, 푸른 창의 대나무에 광채 나게 하였네. 아, 맑은 덕 지닌 분이 잉태하니. 홀연 천지간 빼어난 기운 타고나셨네. 호수와 산이 환하게 빛나니, 명문 가문이 외손자를 둘 징조요, 하늘과 땅의 기운이 화합하니, 우리나라 인문이 발전할 운수를 열었네. 구름 놀의 고운 빛깔이 아스라한데 소아는 상서로운 달빛을 뿌리고, 북두(北斗)의 별이 내는 신령함은 황홀한데 검은 용이 태몽을 따라 나타났구나. 위대한 현인이 이곳에 탄생하였네. 기품은 탄생 때부터 맑고 빼어나서 그 효성은 능히 어머니를 위해 기도할 수 있었고, 도덕은 벼슬길에 처음 나선 날로부터 증험되었네. 그 품은 뜻은 성인과 나란하고자 하여,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학문을 이어서 하나의 이(理)의 근원을 열었고, 밝음은 신령한 시초(蓍草)나 명촉(明燭)1과 같아, 조정에 올라 삼대(三代)의 법도를 엄연하게 행하였네. 상서로운 봉황이나 기린보다 밝으니, 문교(文敎)의 계승과 전수1에 세운 공이 끝이 없네. 누군들 태산(泰山)과 북두(北斗)처럼 우러르지 않으리오, 마음으로 쓰고 고침에 비결이 있었네. 남겨진 안석에는 아직도 선생의 정신이 남아 있으니, 이 때문에 추(鄒)나라 서당에서는 맹자의 어머니가 골랐던 이웃에 대해 말하게 되고1, 노(魯)나라 이구산(尼丘山)에서는 공자의 성스러운 탄생을 생각하게 되네.1 붉은 빛 건물의 지붕날개가 의구한 곳에 아스라이 선생의 발길이 임하여 계신 듯하고, 푸른 빛 대나무가 뻗어 나와 시들지 않은 곳에 진실로 수목조차 애석해 하는 것 같구나. 백년토록 아끼고 지켜온 정성이 더욱 도타우니 타인에게도 오히려 그런 마음이 들게 되고, 세대를 바꾸며 계승해 온 마음이 여기에 보존되어 있으니 하물며 후손으로서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오죽헌의 주인은 유학(儒學)을 하는 권씨(權氏)라네. 신씨(申氏)로부터 이 집을 전해 받았으니, 율곡 선생과 같은 외손자일세. 지파(支派)는 모두 청정한 본원(本源)에서 비롯하였으니, 양양하게 남은 은택이 계속 이어받고, 유풍이 아직 오랜 문벌 도타우니, 면면히 유업(遺業)이 계승되었네. 우뚝한 용마루와 서까래를 항상 쳐다보니, 연대를 생각함에 감흥이 더욱 일고, 오래도록 바람과 비에 깎이고 퇴락하니, 집을 짓기를 생각함에 감탄이 더해지네. 이에 이 해우(海郵)의 선관(仙官)1을 돌아보니, 바로 석담(石潭:율곡 선생) 명문 집안의 후손이네. 선조를 한없이 추모하는 생각이 부합하여 함께 두루 자문하였고, 정성껏 터전을 돕고자 하는 계획에 맞추어 이에 함께 크게 헤아렸네. 산의 정령들은 신령의 도끼를 가지고 도와서, 좋은 재목들이 대들보를 지탱할 수 있었고, 바다의 신1은 신령의 채찍을 가져다 총석을 옮겨 섬돌을 보수할 수 있었네. 드디어 완성된 집은 그 옛 법식을 따랐으니, 오로지 썩고 깨진 목재와 기와만을 바꾸어서 새롭게 하였다네. 큰 구름이 그려진 붉은 빛 두공(枓栱)1은 너울너울 인간 세상의 바깥으로 벗어났고, 바다와 마주한 푸른 빛 남쪽 창문은 오똑하게 신선 궁궐의 대문과 높이를 겨루네. 정원을 둘러싼 예부터 심어 기른 대나무는 하나하나 눈과 서리같은 절개이고, 지붕에 닿을 듯 많이 남겨져 정돈된 글은 한권한권 성현(聖賢)의 마음이라. 산 높고 물이 멀리 흘러 그 풍모를 우러르는 듯한데, 땅이 펼쳐지고 하늘이 열려 이 집이 나타났네. 여러 선비들과 함께 여기에서 거주하니,1 귀에 가득 현송(絃誦)이1 계속되고, 군자가 높아지고 딛는 것을 생각하니20) 보이는 것마다 갱장(羹墻)의 그리움이 일어나네.2 맑은 향기 책에 퍼지니 경전을 연구하던 날을 상상하게 하고, 푸른 대나무 침상에 드리우니 활을 걸어 놓았던2 곳임을 짐작하게 하네. 이곳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셨으니 어찌 아름다운 발자취를 잊을 수 있겠으며, 이런 어머님에 이런 아드님이니 진실로 남겨주신 영광을 반드시 길이 전하리라. 문과 담장은 전현의 터전에 환하니, 부서지거나 무너지지 않을 것이고, 서까래를 칠하고 꾸민 것은 후손의 정성이니, 조상의 뜻을 잘 계승하고 잘 이어받았다고 말할 수 있겠구나. 가히 다만 뽕나무와 가래나무2의 공경을 담겠고, 게다가 군자를 만나는2 흥겨움을 또한 이루겠네. 맑은 호수가 이에 보이니 이 땅은 수사(洙泗)의 물결과 만나려 하였고,2 바야흐로 새로 지은 집이 우뚝 서니 이때는 무우(舞雩)에서 즐길 만한 봄이라고 하겠네.2 대관령 좌편(嶺左:강릉)의 의관 갖춘 선비들은 앞을 다투듯 새롭게 거듭나서 선생의 덕을 추앙하고, 동해 바닷가의 난곡(鸞鵠)2처럼 훌륭한 인사들이 함께 잔치를 축하하기 위해 위의를 차려 방문하네. 진실로 아름답구나, 새로 견고하게 지은 집이 대나무와 같으니.2 마땅히 붓을 잡아 송축의 말을 힘껏 하노라. 어영차! 동쪽으로 들보를 드니, 바다에서 솟은 해가 대나무 그림자를 처음 비추네. 위대한 스승의 심법(이 있음을 상상하겠으니, 아침마다 나를 일으켜 세워 빛나는 아침 햇살과 함께하네.2 어영차! 남쪽으로 들보를 드니, 아득히 먼 니구산에 고운 아지랑이 피어나네. 아래로는 건물 담 벽에 스승의 모습이 있으니, 정신이 형형하여 멀리 참배하네. 어영차! 서쪽으로 들보를 드니, 대숲의 밝은 달이 대관령 아래까지 비추네. 천리 떨어진 은병정사30)에도 애틋하게 똑같이 비춰주리니, 밤마다 구곡의 시내에도3 달빛을 나누어주리. 어영차! 북쪽으로 들보를 드니, 풍악산(楓嶽山:금강산)과 설악산이 웅장하게 이어졌네. 한 덩이 기운이 이 신선의 땅에 신령한 기운을 열었으니, 기린 같은 보배로운 문채 집안에 성대하네. 어영차! 위쪽으로 들보를 드니, 북두성이 하늘 중앙에 있어 모든 별이 그 별을 향하네. 후학들도 또한 선생의 도가 고명한 것을 알기에, 천 개의 길이 모두 하나의 빛나는 근원으로 모여 들었네. 어영차! 아래쪽으로 들보를 드니, 호수의 물빛이 출렁대며 들판처럼 끝없이 생동하네. 그 날의 대나무 울타리에 참 비결 전하니3 구름 지나는 하늘 모습이 거울 같은 호수 위에 비치네. 엎드려 바라건대, 대들보를 올린 후 천겁(千劫) 동안 길이 견고하고, 모든 신령들이 함께 보호하여, 배로운 광채를 이 집 가운데에서 영원히 돕고, 가문 대대로 이어지는 독서하는 자제들이 있으며, 백대를 지난 후에도 선생의 풍모를 들어, 선비들이 학문하는 근본 기초를 알게 하소서. 비유하자면 뜻과 몸을 세움에 이 집 대나무에서 보고 느껴서, 선생이 이 당에 항상 대하는 듯하게 하면, 끝없는 상서로운 각종 징조가 아름다울 것이니, 어찌 큰 일을 해내는 사람은 이와 같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랴. 숭정(崇禎) 기원(紀元) 후 세 번째 병술년(176 중춘(仲春)에 후학(後學) 여흥(驪興) 민백순(閔百順)이 삼가 짓다. 이 상량문이 이미 완성되고 17년 후인 임인년(178에 오죽헌을 중수하여 이 글을 걸다.
  • 번역오죽헌중수상량문 烏竹軒重修上梁文 민백순(閔百順 1711-177 빛나고 의젓한 훌륭한 인품을 잊지 못하겠다고 한 것은 『시경(詩經)』의 위(衛)나라 시에서 ‘무성한 대나무’를 노래한 구절이고, 조상의 뜻을 이어 기둥이 쭉쭉 뻗은 집을 짓겠다고 한 것은 『시경(詩經)』의 주(周)나라 시에서 ‘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노래한 구절이다. 오죽헌을 중수하니 인사(人士)들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초목(草木)이 화려하게 광채가 나는 듯하다. 생각해보면 이 오죽헌의 옛 주인은 실로 율곡선생의 외가이네. 거울 같은 호숫가 신선 사는 집에 터를 잡아, 명승(名勝)의 땅을 얻으니 대나무 있는 이 곳이고, 동쪽 땅 양지 바른 곳에 대대로 내려오는 아름다운 덕(德)을 전하니, 현명한 어머니를 닮으신 바로 율곡옹의 풍모(風貌)이다. 산림에 은거하며 활과 깃발의 초빙도 사양하고, 검은 대나무의 곧은 풍모와 운치 있게 조화를 이루었네. 규방의 예술은 그림에 익숙한 솜씨이니, 푸른 창의 대나무에 광채 나게 하였네. 아, 맑은 덕 지닌 분이 잉태하니. 홀연 천지간 빼어난 기운 타고나셨네. 호수와 산이 환하게 빛나니, 명문 가문이 외손자를 둘 징조요, 하늘과 땅의 기운이 화합하니, 우리나라 인문이 발전할 운수를 열었네. 구름 놀의 고운 빛깔이 아스라한데 소아는 상서로운 달빛을 뿌리고, 북두(北斗)의 별이 내는 신령함은 황홀한데 검은 용이 태몽을 따라 나타났구나. 위대한 현인이 이곳에 탄생하였네. 기품은 탄생 때부터 맑고 빼어나서 그 효성은 능히 어머니를 위해 기도할 수 있었고, 도덕은 벼슬길에 처음 나선 날로부터 증험되었네. 그 품은 뜻은 성인과 나란하고자 하여,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학문을 이어서 하나의 이(理)의 근원을 열었고, 밝음은 신령한 시초(蓍草)나 명촉(明燭)1과 같아, 조정에 올라 삼대(三代)의 법도를 엄연하게 행하였네. 상서로운 봉황이나 기린보다 밝으니, 문교(文敎)의 계승과 전수1에 세운 공이 끝이 없네. 누군들 태산(泰山)과 북두(北斗)처럼 우러르지 않으리오, 마음으로 쓰고 고침에 비결이 있었네. 남겨진 안석에는 아직도 선생의 정신이 남아 있으니, 이 때문에 추(鄒)나라 서당에서는 맹자의 어머니가 골랐던 이웃에 대해 말하게 되고1, 노(魯)나라 이구산(尼丘山)에서는 공자의 성스러운 탄생을 생각하게 되네.1 붉은 빛 건물의 지붕날개가 의구한 곳에 아스라이 선생의 발길이 임하여 계신 듯하고, 푸른 빛 대나무가 뻗어 나와 시들지 않은 곳에 진실로 수목조차 애석해 하는 것 같구나. 백년토록 아끼고 지켜온 정성이 더욱 도타우니 타인에게도 오히려 그런 마음이 들게 되고, 세대를 바꾸며 계승해 온 마음이 여기에 보존되어 있으니 하물며 후손으로서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오죽헌의 주인은 유학(儒學)을 하는 권씨(權氏)라네. 신씨(申氏)로부터 이 집을 전해 받았으니, 율곡 선생과 같은 외손자일세. 지파(支派)는 모두 청정한 본원(本源)에서 비롯하였으니, 양양하게 남은 은택이 계속 이어받고, 유풍이 아직 오랜 문벌 도타우니, 면면히 유업(遺業)이 계승되었네. 우뚝한 용마루와 서까래를 항상 쳐다보니, 연대를 생각함에 감흥이 더욱 일고, 오래도록 바람과 비에 깎이고 퇴락하니, 집을 짓기를 생각함에 감탄이 더해지네. 이에 이 해우(海郵)의 선관(仙官)1을 돌아보니, 바로 석담(石潭:율곡 선생) 명문 집안의 후손이네. 선조를 한없이 추모하는 생각이 부합하여 함께 두루 자문하였고, 정성껏 터전을 돕고자 하는 계획에 맞추어 이에 함께 크게 헤아렸네. 산의 정령들은 신령의 도끼를 가지고 도와서, 좋은 재목들이 대들보를 지탱할 수 있었고, 바다의 신1은 신령의 채찍을 가져다 총석을 옮겨 섬돌을 보수할 수 있었네. 드디어 완성된 집은 그 옛 법식을 따랐으니, 오로지 썩고 깨진 목재와 기와만을 바꾸어서 새롭게 하였다네. 큰 구름이 그려진 붉은 빛 두공(枓栱)1은 너울너울 인간 세상의 바깥으로 벗어났고, 바다와 마주한 푸른 빛 남쪽 창문은 오똑하게 신선 궁궐의 대문과 높이를 겨루네. 정원을 둘러싼 예부터 심어 기른 대나무는 하나하나 눈과 서리같은 절개이고, 지붕에 닿을 듯 많이 남겨져 정돈된 글은 한권한권 성현(聖賢)의 마음이라. 산 높고 물이 멀리 흘러 그 풍모를 우러르는 듯한데, 땅이 펼쳐지고 하늘이 열려 이 집이 나타났네. 여러 선비들과 함께 여기에서 거주하니,1 귀에 가득 현송(絃誦)이1 계속되고, 군자가 높아지고 딛는 것을 생각하니20) 보이는 것마다 갱장(羹墻)의 그리움이 일어나네.2 맑은 향기 책에 퍼지니 경전을 연구하던 날을 상상하게 하고, 푸른 대나무 침상에 드리우니 활을 걸어 놓았던2 곳임을 짐작하게 하네. 이곳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셨으니 어찌 아름다운 발자취를 잊을 수 있겠으며, 이런 어머님에 이런 아드님이니 진실로 남겨주신 영광을 반드시 길이 전하리라. 문과 담장은 전현의 터전에 환하니, 부서지거나 무너지지 않을 것이고, 서까래를 칠하고 꾸민 것은 후손의 정성이니, 조상의 뜻을 잘 계승하고 잘 이어받았다고 말할 수 있겠구나. 가히 다만 뽕나무와 가래나무2의 공경을 담겠고, 게다가 군자를 만나는2 흥겨움을 또한 이루겠네. 맑은 호수가 이에 보이니 이 땅은 수사(洙泗)의 물결과 만나려 하였고,2 바야흐로 새로 지은 집이 우뚝 서니 이때는 무우(舞雩)에서 즐길 만한 봄이라고 하겠네.2 대관령 좌편(嶺左:강릉)의 의관 갖춘 선비들은 앞을 다투듯 새롭게 거듭나서 선생의 덕을 추앙하고, 동해 바닷가의 난곡(鸞鵠)2처럼 훌륭한 인사들이 함께 잔치를 축하하기 위해 위의를 차려 방문하네. 진실로 아름답구나, 새로 견고하게 지은 집이 대나무와 같으니.2 마땅히 붓을 잡아 송축의 말을 힘껏 하노라. 어영차! 동쪽으로 들보를 드니, 바다에서 솟은 해가 대나무 그림자를 처음 비추네. 위대한 스승의 심법(이 있음을 상상하겠으니, 아침마다 나를 일으켜 세워 빛나는 아침 햇살과 함께하네.2 어영차! 남쪽으로 들보를 드니, 아득히 먼 니구산에 고운 아지랑이 피어나네. 아래로는 건물 담 벽에 스승의 모습이 있으니, 정신이 형형하여 멀리 참배하네. 어영차! 서쪽으로 들보를 드니, 대숲의 밝은 달이 대관령 아래까지 비추네. 천리 떨어진 은병정사30)에도 애틋하게 똑같이 비춰주리니, 밤마다 구곡의 시내에도3 달빛을 나누어주리. 어영차! 북쪽으로 들보를 드니, 풍악산(楓嶽山:금강산)과 설악산이 웅장하게 이어졌네. 한 덩이 기운이 이 신선의 땅에 신령한 기운을 열었으니, 기린 같은 보배로운 문채 집안에 성대하네. 어영차! 위쪽으로 들보를 드니, 북두성이 하늘 중앙에 있어 모든 별이 그 별을 향하네. 후학들도 또한 선생의 도가 고명한 것을 알기에, 천 개의 길이 모두 하나의 빛나는 근원으로 모여 들었네. 어영차! 아래쪽으로 들보를 드니, 호수의 물빛이 출렁대며 들판처럼 끝없이 생동하네. 그 날의 대나무 울타리에 참 비결 전하니3 구름 지나는 하늘 모습이 거울 같은 호수 위에 비치네. 엎드려 바라건대, 대들보를 올린 후 천겁(千劫) 동안 길이 견고하고, 모든 신령들이 함께 보호하여, 배로운 광채를 이 집 가운데에서 영원히 돕고, 가문 대대로 이어지는 독서하는 자제들이 있으며, 백대를 지난 후에도 선생의 풍모를 들어, 선비들이 학문하는 근본 기초를 알게 하소서. 비유하자면 뜻과 몸을 세움에 이 집 대나무에서 보고 느껴서, 선생이 이 당에 항상 대하는 듯하게 하면, 끝없는 상서로운 각종 징조가 아름다울 것이니, 어찌 큰 일을 해내는 사람은 이와 같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랴. 숭정(崇禎) 기원(紀元) 후 세 번째 병술년(176 중춘(仲春)에 후학(後學) 여흥(驪興) 민백순(閔百順)이 삼가 짓다. 이 상량문이 이미 완성되고 17년 후인 임인년(178에 오죽헌을 중수하여 이 글을 걸다.
  • 역주彊 : 疆 오죽헌 중수는 여러 차례 있었다. 이 글을 쓰기 전에는 정해년(170에 시작했던 오죽헌 중수사업을 꼽을 수 있다. 그 당시는 양양(襄陽) 군수 정필동(鄭必東 1653-171과 후임 군수인 이해조(李海朝 1660-171가 중수사업을 도왔다고 한다. 『시경(詩經)』의 <위풍(衛風)> 「기욱(淇奧)」편에서 “위엄 있고 너그러우며 빛나고도 의젓하다. [瑟兮僴兮,赫兮咺兮. 有匪君子,終不可諼兮]라고 했다. 대나무를 소재로 위나라 무공(武公)의 덕을 칭송한 이 구절을 인용하여 이 글에서 다룰 오죽헌 대나무와 오죽헌 주인의 인품을 관련시켰다. 『시경(詩經)』의 <소아(小雅)> 「사간(斯干)」편에서 “훌륭한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계승하여 고대광실을 지어야지…널찍한 정원에 쭉쭉 뻗은 기둥이네.[似續妣祖 築室百堵…殖殖其庭,有覺其楹]”라고 했다. 여기서 “교(覺)”는 기둥이 쭉쭉 뻗은 모습이다. 이 구절을 인용하여 오죽헌을 중수하는 뜻을 밝혔다. 오죽헌은 단종 때 병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낸 최응현(崔應賢 1428-150 이래 최응현의 사위가 된 이사온이 물려받았고, 이사온은 다시 자신의 사위 신명화(申命和 1476-152에게 오죽헌을 물려주었다. 신명화는 넷째 사위인 권화(權和)에게, 권화는 아들 권처균(權處均)에게 물려주었다. 신명화가 바로 신사임당의 아버지이니, 율곡선생은 신명화의 외손이 된다. 옛날 중국에서 왕이 선비를 부를 땐 활[弓]을, 대부를 부를 땐 깃발[旌]을 사용하여 사람을 불렀는데, 이로 인해 훗날 활과 깃발[弓旌]은 현자(賢者)를 초빙하는 왕의 선물을 뜻하게 되었다. 원문의 “낭간(琅玕)”은 “낭간(瑯玕)”이라고도 쓰는데, 대나무의 푸름을 형용하기도 하고 혹은 대나무 그 자체를 가리키기도 하는 말이다. 율곡 선생이 5세 때에 신사임당이 위독한 적이 있었는데 율곡 선생이 남모르게 외할아버지 사당(祠堂)에 들어가 기도를 드렸다. 그의 이모가 마침 지나가다가 보고 경탄하고 그를 달래어 마음을 풀어 주고 안고서 돌아왔다고 한다. 김장생의 「율곡행장」을 참조할 것. 원문은 낙민(洛閩)인데, 중국 송나라의 정자(程子) 즉,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형제와 주자(朱子)를 가리킨다. 이는 정명도와 정이천이 낙양(洛陽) 출신이고, 주자가 민중(閩中 : 福建省) 출신이기 때문이다. 시초는 옛날 고대 중국에서 사용한 점복(占卜) 용도의 풀이다. 여기서는 율곡 선생이 국가의 나아갈 길을 예언하는 인물이었음을 밝히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1 명촉(明燭)은 옛날 고대 중국에서 사용한 제사(祭祀) 용도의 초이다。『주례(周禮)』 「추관(秋官)·사훤씨(司烜氏)」를 참고할 것. 12 명촉(明燭)은 옛날 고대 중국에서 사용한 제사(祭祀) 용도의 초이다。『주례(周禮)』 「추관(秋官)·사훤씨(司烜氏)」를 참고할 것. 1 맹자 어머니의 이웃이란 ‘맹모택린(孟母擇隣)’을 말한다. 중국 한나라 유향(劉向)이 지은 『열녀전(列女傳)·추맹가모(鄒孟軻母)』에 따르면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 무덤 근처, 시장 근처, 서당 근처로 이웃을 바꾸었다고 한다. ‘맹모삼천(孟母三遷)’이라고도 한다. 1 이 구절은 맹자의 고향인 추(鄒)나라의 서당은 맹자를 떠올리게 하고, 공자가 태어난 이구산(尼丘山)은 공자를 연상하게 하듯이, 강릉의 오죽헌은 율곡 선생을 생각나게 한다는 의미이다. 1 ‘해우(海郵)’는 바닷가 고을인 강릉을 의미하고, ‘선관(仙官)’은 율곡을 가리킨다. 이 글에서는 율곡을 천상의 선관(仙官)이 지상에 적강(謫降)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1 원문은 ‘해약(海若)’인데, 중국 전설 속의 바다의 신이다. 『장자(莊子)』에서는 ‘북해약(北海若)’이라고도 했다. 1 전통 목조건물에서 대들보나 도리에 가해지는 무게를 모아 기둥에 전하는 역할을 하도록 끼워 넣은 목조구조(木組構造)이다. 방형의 두(斗)와 수평의 공(拱)이 교차하게 짜여서 처마 끝을 높이 쳐들고 앞쪽 까치발을 받치고 있다. 한국에서는 보통 ‘공포(拱包)’라고 한다. 1 이 구절은 “선조의 할머니와 선조의 사업을 계승하여, 궁실의 일백 담을 쌓으니…여기에서 거주하고 여기에서 거처하네(似續妣祖 築室百堵…爰居爰處)”라는 『시경(詩經)』 「사간(斯干)」의 구절에서 유래했다. 1 원문은 ‘현송(絃誦)’인데 가르치고 낭독하는 일을 가리킨다. 고대 중국에서 『시경(詩經)』을 배울 때 현악(絃樂) 반주에 부르는 노래를 ‘현가(絃歌)’라 하고, 반주 없이 낭독하는 것을 ‘송(誦)’이라고 한 것에서 유래했다. 20) 이 구절은 “바람과 비를 막는 바이며, 새와 쥐를 제거하는 바이니, 군자가 높여 지는 바이라…추녀는 새가 이에 날개를 편 듯 하며, 처마는 꿩이 이에 나는 듯하니, 군자가 딛는 바이다”라는 『시경(詩經)』 「사간(斯干)」의 구절에서 유래했다. 2 ‘갱장(羹墻)’은 돌아가신 분을 늘 사모하는 것을 말한다. 요 임금이 죽은 뒤에 순 임금이 담장만 바라봐도 국그릇을 들여다 봐도 요 임금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한다. 『후한서(後漢書)』 「이두열전(李杜列傳)」을 참조할 것. 2 원문은 ‘현호(懸弧)’인데, 아들을 낳았다는 뜻이다. 옛날 중국에서는 무예를 숭상하여 아들을 낳으면 대문의 왼편에 활을 걸어 표시하였다는 것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2 원문은 ‘상재(桑梓)’인데, 부모가 세워 물려준 집을 의미한다. 『시경』 「소반(小弁)」의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반드시 공경하는데 우러러볼 데가 아버님 아님이 없으며 의지할 데가 어머님 아님이 없도다”라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2 『시경』「청청자아(菁菁者莪)」의 작품명을 줄인 말이다. 그 내용은 군자를 만나는 즐거움을 노래했다. 2 수사(洙泗)는 중국 산동성에 흐르는 물인 수수(洙水)와 사수(泗水)이다. 수수는 북쪽에 있고, 사수는 남쪽에 있는데 공자의 고향인 곡부(曲阜)를 지난다. 공자는 수수와 사수 사이에서 문도를 모아 가르쳤기에, 대개 공자를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2 ‘무우(舞雩)’는 『논어(論語)・선진(先進)』에 언급된 지명이다.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늦은 봄날 봄옷이 이루어지면 사람들과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고 싶다고 말하여 공자의 칭찬을 받은 바 있다. 2 중국 당나라 한유(韓愈)의 「전중소감마군묘명(殿中少監馬君墓銘)」에서 “물러나 소부(少傅)를 바라보니 푸른 대 푸른 오동에 난새와 고니가 우뚝 선 듯하니, 능히 그 가업을 지킬 만한 분이구나(翠竹碧梧 鸞鵠停峙 能守其業者也)” 하였다. 여기서는 뛰어난 인재들을 비유한 말이다. 2 『시경(詩經)』의 <소아(小雅)> 「사간(斯干)」편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여기서는 이 집이 물에 임해 있고 산을 향하여 있는데 그 건물 기초의 견고함이 대나무가 빽빽한 것과 같다는 의미이다. 2 율곡 선생의 가르침이 날마다 자신을 일깨우니 마치 아침마다 자신을 일으켜 세워주는 아침 햇살과 같다는 의미이다. 30) 강릉에서 태어난 율곡은 벼슬에서 물러났을 때 주로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사업에 종사하였다. 은병정사(隱屛精舍)는 율곡이 해주에 마련한 건물로 이 곳에서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지었다. 3 율곡이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따 황해도 해주 야두촌(野頭村)에서 경영한 고산구곡(高山九曲)을 가리킨다. 3 원문은 ‘묘전(妙詮)’인데 오죽헌에 보관되어 온 『격몽요결(擊蒙要訣)』 초고본을 가리킨다.

현판(S18)

현판(S18
  • 원문謹步烏竹軒板上韻 綠軒如畵帶嶕嶢。 洞裏孤村賴不凋。 龍夢舊棲元有地。 烏皮老箘又干霄。 黃黃蒲荇寒潭出。 歷歷桑麻淡露消。 門外駐鞭怊悵立。 夕陽梅鶴海天遙。 故宅淸晶近海濱。 水明山秀卜爲隣。 元來基業有賢母。 更覺坤靈降哲人。 古硯珎藏傳有日。 要言圭復隔如晨。 經邦遠慮嗟何在。 志士于今倍愴神。 玄黓困頓秋八月。 後學光山。金震休。
  • 국문오죽헌 판상운에 따라 삼가 짓다 김진휴(金震休 1807-?) 높은 산을 두르고 있어 푸른 대나무의 오죽헌은 그림같으니, 골짜기 안 외로운 마을이 그 덕분에 시들어 보이지 않네. 용꿈이 깃든 옛집은 원래부터 이곳에 있는데, 검은 껍질의 오랜 대나무 또한 하늘에 닿을 듯 솟아있네. 아름다운 부들과 마름이 있는 차가운 연못물이 흘러나오고, 또렷한 뽕밭과 삼밭에 어린 옅은 이슬들은 사라지네. 문 밖에 말을 세우고 우두커니 서글프게 서 있노라니 해 저무는 바닷가 저 멀리로 매학정(梅鶴亭)이 어른거리네. 바닷가 가까이 서 있는 맑게 빛나는 옛집 물 맑고 산 고운 곳과 이웃하도록 터를 잡았네. 원래의 바탕은 어진 어머니에서 받았고, 땅의 영험이 현철한 인물을 내려줌을 새삼 느끼네. 쓰시던 옛 벼루 보배로이 간직하니 전해질 날 있고, 『격몽요결』의 말씀을 여러번 외우니 지난 새벽일 같네. 나라를 걱정하던 깊은 생각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우국지사들의 마음은 지금에 곱절이나 슬프네. 현익곤돈(玄黓困頓 : 임자년(18 가을 8월 후학(後學) 광산(光山) 김진휴(金震休)
  • 번역오죽헌 판상운에 따라 삼가 짓다 김진휴(金震休 1807-?) 높은 산을 두르고 있어 푸른 대나무의 오죽헌은 그림같으니, 골짜기 안 외로운 마을이 그 덕분에 시들어 보이지 않네. 용꿈이 깃든 옛집은 원래부터 이곳에 있는데, 검은 껍질의 오랜 대나무 또한 하늘에 닿을 듯 솟아있네. 아름다운 부들과 마름이 있는 차가운 연못물이 흘러나오고, 또렷한 뽕밭과 삼밭에 어린 옅은 이슬들은 사라지네. 문 밖에 말을 세우고 우두커니 서글프게 서 있노라니 해 저무는 바닷가 저 멀리로 매학정(梅鶴亭)이 어른거리네. 바닷가 가까이 서 있는 맑게 빛나는 옛집 물 맑고 산 고운 곳과 이웃하도록 터를 잡았네. 원래의 바탕은 어진 어머니에서 받았고, 땅의 영험이 현철한 인물을 내려줌을 새삼 느끼네. 쓰시던 옛 벼루 보배로이 간직하니 전해질 날 있고, 『격몽요결』의 말씀을 여러번 외우니 지난 새벽일 같네. 나라를 걱정하던 깊은 생각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우국지사들의 마음은 지금에 곱절이나 슬프네. 현익곤돈(玄黓困頓 : 임자년(18 가을 8월 후학(後學) 광산(光山) 김진휴(金震休)
  • 역주본관은 광산(光山). 조부는 김달명(金達鳴), 부친은 김문연(金文淵). 1834년 식년시(式年試)에 병과(丙科)로 합격. 이후 사헌부 지평, 정언(正言), 장령(掌令) 등을 역임. 거주지는 광주(光州)이다. 신사임당(申師任堂)이 율곡 이이를 낳을 때 검은 용의 출현을 태몽으로 꾸었다 해서, 그 사연이 오죽헌에 있는 ‘몽룡실(夢龍室)’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강릉의 매학정은 나중에 백련(白蓮) 김형진(金衡鎭)이 사들여 이름을 금란정(金蘭亭)으로 바꾼다. 매학정은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아들로 삼은 서호처사(西湖處士) 임포(林逋)의 고사를 따른 것이다. 원문은 ‘규복(圭復)’으로, ‘백규삼복(白圭三復)’의 준말이다. 이 말은 공자의 제자 남용(南容)이 백규‘(白圭)’라는 『시경』의 작품을 날마다 세 번씩 반복해서 외웠다는 『논어』 선진(先進)편이 그 출전이다.

현판(S19)

현판(S19
  • 원문夢龍室重修記 夫賢人之有遺廬。猶國之有喬木蔚然爲表率於一邦也。府北十里許有曰夢龍室者。栗谷李文成公鍾祥之所。厥後隨毁隨補至今巍然。此其外鄕也。先生平日嘗爲省覲來往頻。仍遺風餘韻尙有存者。則後人之瞻慕興感。亦豈下於闕里之昌平而婺源之虹井也。嗚乎。四十年。斯路榛塞。室亦頹圮。先是鄕人士相與爲會。止保古蹟。而未遑改修也。余莅玆有年。每不禁掬蕪之歎矣。先生姨裔孫權君赫來間請重新。而建國之初。力不暇及。然岌岌乎勢不容已也。乃與本會。力陳上司。旁通學界。道郡內十數萬師生。競相醵金。頗至巨款也。歲戊子仲秋。募工庀材。樑榱軒窓之朽敗。礎石堦戺之欹側者。易之新整之固。閱一年而幷與宸閣悉復舊樣。監其役者。鄕之士崔溟集也。於是。庭竹交輝。士僚相慶曰。大賢遺躅。斯可以復尋。而亦足爲扶植吾道之一助也。程子安樂亭銘曰。水不忍廢而地不忍荒。吁。如或正學而可忘。雖使水不廢地不荒。有何補哉。先生遺集時適復刊云。苟欲知其正學。當於此書求之可也。盍相與勉焉。至若肇錫之義。興廢之蹟。前述已備。無容更贅矣。工旣訖。僉責余一言以識實。略敍其槪。以諗于後余者云。 檀君紀元四二八二年。己丑年。八月 日。 江陵敎育會長。古蹟保存會長。江陵郡守。崔柄爲。
  • 국문몽룡실중수기 최병위(崔柄爲 1904- ?) 대저 현인(賢人)이 남긴 옛집은 마치 나라에 큰 교목이 있어 성대하게 한 나라의 표준이 되는 것과 같다. 강릉부 북쪽 10리쯤 되는 곳에 있는 ‘몽룡실(夢龍室)’이라는 집은 율곡(栗谷)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가 태어난, 상서로움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 후 건물이 훼손될 때마다 수리를 하였기에 지금에 와서도 우뚝하다. 또한 이곳은 그분의 외가(外家)가 있는 고을이라 일찍이 선생이 평소에 어른들을 뵈러 왕래가 빈번하였기에 선생이 남기신 풍모와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후세 사람들이 우러러 사모하며 감동받는 일이 어찌 궐리(闕里)의 창평(昌平)이나 무원(婺源)의 홍정(虹井) 주희의 집안에는 위재정(韋齋井 위재는 주희 부친의 호이다)이 있는데, 주자가 출생할 때 샘 속에서 자줏빛 기운이 나타났다고 하여, 세상에서는 이 우물을 홍정(虹井),만 못하겠는가! 오호라. 이런 길이 40년간이나 잡목으로 막혀버렸고 건물 또한 무너졌다. 한편, 이보다 앞서 고장의 인사들은 고적보존회를 꾸려왔으나 고적(古蹟)을 보호하는데 그쳤을 뿐 개수할 겨를까지는 없었다. 그래서 내가 이 고장에 부임한 이래 몇 해 동안, 우거진 잡초를 움켜쥐는 탄식을 매번 금할 수가 없었다. 이런 와중에 율곡선생의 이모댁 후손인 권혁래(權赫來) 군이 건물을 새롭게 수리해야 한다고 간간이 부탁해 왔다. 건국초기이기에 역량이 닿지 않았으나 형세가 워낙 위급하여 손을 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본 고적보존회와 더불어 이에 상급 관청에 힘껏 뜻을 진달하고, 아울러 교육계와 연결하니 도내(道內) 및 군내(郡內)의 수많은 교사와 학생들이 앞 다투어 서로 성금을 내어 자못 거액이 되었다. 무자년(194 중추(仲秋)에 기술자를 모으고 재료를 갖춰, 들보와 서까래 및 난간과 창문의 썩고 부서진 부분과 주춧돌과 섬돌 및 계단 옆 측면 마감돌의 기울어진 부분을 새것으로 바꾸고 튼튼하게 다듬었다. 1년이 지나서 어제각(御製閣)과 아울러 옛 모습을 회복하였다. 공사를 감독한 사람은 우리 고장의 선비인 최명집(崔溟集)이다. 이에 오죽헌의 뜰과 대나무가 서로 빛나게 되니 선비와 관료들이 서로 축하하며 말하길, “위대한 현인이 남겨주신 자취를 여기에서 다시 찾을 수 있게 되었으니, 또한 우리 유학을 붙들어 지키는 데 한 가지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자(程子)의 「안락정명(安樂亭銘)」에 이르길 “그 우물물을 차마 버려둘 수 없고, 그 터를 차마 황폐하게 놓아 둘 수 없다. 아! 만약 정학(正學)을 가히 잊어버릴 수 있다면, 비록 설령 그 물이 버려지지 않고 그 터가 황폐하게 되지 않도록 하였다고 한들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율곡선생의 유집(遺集)이 때마침 다시 간행되었다고 하니, 만일 무엇이 정학(正學)인줄 알고 싶다면, 마땅히 이 책에서 찾으면 될 것이다. 어찌 서로 권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처음 당호(堂號)를 내려주신 뜻과 이 집이 세워지고 무너지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이미 전에 기록된 글이 갖춰져 있으니 다시 군말을 할 필요는 없겠다. 공사가 끝나고 나자 모두 나에게 한마디 말로써 이 사실을 기록하라고 요구하기에 대략 그 경개를 서술하여 우리 뒤의 사람들에게 알린다. 단군기원 4282년 기축년(194 8월 어느 날 강릉교육회 회장, 고적보존회 회장 강릉군수 최병위(崔柄爲)가 짓다.
  • 번역몽룡실중수기 최병위(崔柄爲 1904- ?) 대저 현인(賢人)이 남긴 옛집은 마치 나라에 큰 교목이 있어 성대하게 한 나라의 표준이 되는 것과 같다. 강릉부 북쪽 10리쯤 되는 곳에 있는 ‘몽룡실(夢龍室)’이라는 집은 율곡(栗谷)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가 태어난, 상서로움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 후 건물이 훼손될 때마다 수리를 하였기에 지금에 와서도 우뚝하다. 또한 이곳은 그분의 외가(外家)가 있는 고을이라 일찍이 선생이 평소에 어른들을 뵈러 왕래가 빈번하였기에 선생이 남기신 풍모와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후세 사람들이 우러러 사모하며 감동받는 일이 어찌 궐리(闕里)의 창평(昌平)이나 무원(婺源)의 홍정(虹井) 주희의 집안에는 위재정(韋齋井 위재는 주희 부친의 호이다)이 있는데, 주자가 출생할 때 샘 속에서 자줏빛 기운이 나타났다고 하여, 세상에서는 이 우물을 홍정(虹井),만 못하겠는가! 오호라. 이런 길이 40년간이나 잡목으로 막혀버렸고 건물 또한 무너졌다. 한편, 이보다 앞서 고장의 인사들은 고적보존회를 꾸려왔으나 고적(古蹟)을 보호하는데 그쳤을 뿐 개수할 겨를까지는 없었다. 그래서 내가 이 고장에 부임한 이래 몇 해 동안, 우거진 잡초를 움켜쥐는 탄식을 매번 금할 수가 없었다. 이런 와중에 율곡선생의 이모댁 후손인 권혁래(權赫來) 군이 건물을 새롭게 수리해야 한다고 간간이 부탁해 왔다. 건국초기이기에 역량이 닿지 않았으나 형세가 워낙 위급하여 손을 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본 고적보존회와 더불어 이에 상급 관청에 힘껏 뜻을 진달하고, 아울러 교육계와 연결하니 도내(道內) 및 군내(郡內)의 수많은 교사와 학생들이 앞 다투어 서로 성금을 내어 자못 거액이 되었다. 무자년(194 중추(仲秋)에 기술자를 모으고 재료를 갖춰, 들보와 서까래 및 난간과 창문의 썩고 부서진 부분과 주춧돌과 섬돌 및 계단 옆 측면 마감돌의 기울어진 부분을 새것으로 바꾸고 튼튼하게 다듬었다. 1년이 지나서 어제각(御製閣)과 아울러 옛 모습을 회복하였다. 공사를 감독한 사람은 우리 고장의 선비인 최명집(崔溟集)이다. 이에 오죽헌의 뜰과 대나무가 서로 빛나게 되니 선비와 관료들이 서로 축하하며 말하길, “위대한 현인이 남겨주신 자취를 여기에서 다시 찾을 수 있게 되었으니, 또한 우리 유학을 붙들어 지키는 데 한 가지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자(程子)의 「안락정명(安樂亭銘)」에 이르길 “그 우물물을 차마 버려둘 수 없고, 그 터를 차마 황폐하게 놓아 둘 수 없다. 아! 만약 정학(正學)을 가히 잊어버릴 수 있다면, 비록 설령 그 물이 버려지지 않고 그 터가 황폐하게 되지 않도록 하였다고 한들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율곡선생의 유집(遺集)이 때마침 다시 간행되었다고 하니, 만일 무엇이 정학(正學)인줄 알고 싶다면, 마땅히 이 책에서 찾으면 될 것이다. 어찌 서로 권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처음 당호(堂號)를 내려주신 뜻과 이 집이 세워지고 무너지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이미 전에 기록된 글이 갖춰져 있으니 다시 군말을 할 필요는 없겠다. 공사가 끝나고 나자 모두 나에게 한마디 말로써 이 사실을 기록하라고 요구하기에 대략 그 경개를 서술하여 우리 뒤의 사람들에게 알린다. 단군기원 4282년 기축년(194 8월 어느 날 강릉교육회 회장, 고적보존회 회장 강릉군수 최병위(崔柄爲)가 짓다.
  • 역주정자(程子)의 「안락정명(安樂亭銘)」 원문에는 “吁”가 아니라 “嗚呼正學 其何可忘”으로 되어있다. 정자(程子)의 「안락정명(安樂亭銘)」 원문에는 “雖”가 아니라 “政”으로 되어 있다. 정자(程子)의 「안락정명(安樂亭銘)」 원문에는 “有何補哉”가 아니라 “顧何益之有哉”로 되어 있다. 경북 포항출생. 강원군수, 강원도 문교사회국장 역임. 1950년 8월 24일 새벽, 서울 청량리에 있는 지인(知人)의 집에서 자다가 민청단원에게 납치되어 마포형무소에 수감. 이후 소식이 끊겨 납북 처리됨. 춘추전국시대 노(魯)나라의 도성(都城)이었던 곡부(曲阜)는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濟南)에서 남쪽으로 약 130㎞떨어진 곳으로, 이 부근지역인 창평에서 공자(孔子)가 서기전 551년에 태어났다. 주희의 집안에는 위재정(韋齋井 위재는 주희 부친의 호이다)이 있는데, 주자가 출생할 때 샘 속에서 자줏빛 기운이 나타났다고 하여, 세상에서는 이 우물을 홍정(虹井), 즉 무지개 우물이라고 불렀다. 중국 북송(北宋)의 정이천(程伊川)이 지은 글이다. 안락정(安樂亭)은 공자의 제자인 안연(顔淵)이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며 살던 옛터에 지은 정자이다. 원문에는 “우(吁)”로 되어 있으나 정자의 「안락정명(安樂亭銘)」 원문에는 “오호정학(嗚呼正學) 기하가망(其何可忘)”으로 되어있다. 이 경우의 번역은 “오호라! 정학을 어찌 가히 잊을 수 있겠는가!”이다. 원문에는 “수(雖)”로 되어 있으나 정자의 「안락정명(安樂亭銘)」 원문에는 “정(政)”으로 되어 있다. 이 경우 해석은 별다른 차이가 없이 똑같이 “비록”이라고 번역된다. 원문에는 “유하보재(有何補哉)”로 되어 있으나, 정자의 「안락정명(安樂亭銘)」 원문에는 “고하익지유재(顧何益之有哉)”로 되어 있다. 이 경우의 번역은 “도리어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이다.

현판(S20)

현판(S20
  • 원문題同年進士壯元權處士山居 新軒高起北山隈。 下有田園四面開。 桑塢日閑鷄散啄。 稻畦秋熟酒初醅。 平臨海峀擎天立。 捲掃溪雲入戶來。 喚與隣翁成好會。 煑葵燒栗坐邊堆。 再題仍次前韻 緣崖穿壑更攀隈。 路入松門眼爲開。 坐席細論屛裡畵。 呼兒新漉甕中醅。 煙霞久閉徵君臥。 猿鶴應譏刺史來。 四視小堂高萬仞。 臨瀛華館僅如堆。 嘉靖乙巳春。國耳▨。
  • 국문진사과 과거시험의 합격동기생인 장원(壯元) 권처사(權處士)의 산 속 거처에 쓰다 박광우(朴光佑 1495-154 북산 산굽이에 집이 새로 우뚝 세워졌는데 아래로는 전원이 있어 사방으로 열려있구나. 뽕나무 마을 한가한 낮에 닭들은 모이를 쪼고 가을 논두렁에 벼는 여물고 술도 막 익어가네. 눈앞에 펼쳐진 바닷가 산은 하늘을 받치듯 섰고 말아 올라간 시냇가 구름은 집으로 들어오네. 이웃 노인들 모셔다 더불어 좋은 모임을 만드니 ? 삶은 아욱과 구운 밤이 자리 옆에 수북이 쌓이네. 앞의 시를 차운하여 다시 짓다 물굽이 돌아 골짝을 지나 다시 산기슭을 오르다가 입구에 심은 소나무 문에 들어서자 시야가 열리네. 자리에 앉아 병풍의 그림을 조곤조곤 논하여 보고 아이 불러 술독의 갓 익은 술 새로 걸러오게 하네. 징군(徵君)이 오래도록 연하(煙霞)에 묻혀 지내도 자사(刺史)가 찾아오리란 걸 원학(猿鶴)은 알리라. 만 길 높이의 작은 집에서 사방을 바라보니 화려한 임영관(臨瀛館)조차 작은 언덕과 같네. 가정(嘉靖) 연간 을사년(154 봄 국이(國耳)가 쓰다.
  • 번역진사과 과거시험의 합격동기생인 장원(壯元) 권처사(權處士)의 산 속 거처에 쓰다 박광우(朴光佑 1495-154 북산 산굽이에 집이 새로 우뚝 세워졌는데 아래로는 전원이 있어 사방으로 열려있구나. 뽕나무 마을 한가한 낮에 닭들은 모이를 쪼고 가을 논두렁에 벼는 여물고 술도 막 익어가네. 눈앞에 펼쳐진 바닷가 산은 하늘을 받치듯 섰고 말아 올라간 시냇가 구름은 집으로 들어오네. 이웃 노인들 모셔다 더불어 좋은 모임을 만드니 ? 삶은 아욱과 구운 밤이 자리 옆에 수북이 쌓이네. 앞의 시를 차운하여 다시 짓다 물굽이 돌아 골짝을 지나 다시 산기슭을 오르다가 입구에 심은 소나무 문에 들어서자 시야가 열리네. 자리에 앉아 병풍의 그림을 조곤조곤 논하여 보고 아이 불러 술독의 갓 익은 술 새로 걸러오게 하네. 징군(徵君)이 오래도록 연하(煙霞)에 묻혀 지내도 자사(刺史)가 찾아오리란 걸 원학(猿鶴)은 알리라. 만 길 높이의 작은 집에서 사방을 바라보니 화려한 임영관(臨瀛館)조차 작은 언덕과 같네. 가정(嘉靖) 연간 을사년(154 봄 국이(國耳)가 쓰다.
  • 역주平 : 1830년에 간행된 『관동지(關東誌)』에는 ‘午’로 되어 있다. 捲 : 1830년에 간행된 『관동지(關東誌)』에는 ‘倦’으로 되어 있다. ▨ : 書 사임당의 부친인 신명화(申命和)의 넷째 사위가 오죽헌의 주인인 권화(權和 1518-157이다. 권화의 아버지 권련(權璉)이 1519년 진사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박광우와 연배가 비슷하다. 따라서 여기서 박광우가 말한 권처사는 권련으로 추정된다. 호는 필재(畢齋). 문과시(文科試)에 장원급제했고,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편찬했다. 전우치와 교분이 있었고, 재령군수를 역임했으며, 1543년에 강릉부사로 재직하였다. 2년 후 을사사화로 죽임을 당했다. ‘북산’은 오죽헌 근처는 아니고 권처사가 따로 은거하여 살고 있는 거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조상과 관련된 작품이라 오죽헌에 걸어 둔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서는 공치규(孔稚圭)가 ‘주옹(周顒)’을 꾸짖기 위해 쓴 「북산이문(北山移文)」에서의 ‘북산’을 의미하기도 한다. ‘주옹(周顒)’은 북산에서의 은거를 버리고 벼슬길로 나섰던 인물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북산은 박광우에게 정신적인 고향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1830년에 간행된 『관동지(關東誌)』에는 원문의 ‘平’자 대신 ‘午’로 되어 있어, 이 경우는 “바닷가 산에 올라 한낮의 하늘을 받치듯 섰다가”로 번역된다. 1830년에 간행된 『관동지(關東誌)』에는 원문의 ‘捲’자 대신 ‘倦’자로 되어 있어, 이 경우는 “게을리 냇가 구름을 쓸어내며 집으로 들어오네”로 번역된다.

현판(S21)

현판(S21
  • 원문次 鶴髮江湖自在身。 千竿脩竹是爲隣。 王猷瀟洒知音好。 與可淸貧晩食珎。 爽氣能令蒸鬱冷。 貞姿留取雪霜新。 一軒心事曾如許。 客到何須問主人。 又 何物平生誤此身。 軒軒義氣逈無隣。 胸襟自得溪山趣。 肴核前陳水陸珎。 樽酒不論淸與濁。 交遊無別舊兼新。 颯然高臥窓前竹。 準擬羲皇上世人。 李龜齡
  • 국문차운하다 이구령(李龜齡 ?-1592 유유자적 강호에 사는 백발의 노옹에게, 천 줄기 긴 대나무가 바로 그의 이웃일세. 초탈한 왕자유처럼 좋은 벗으로 사귀면서, 늦은 식사라도 달가워 하는 청빈한 삶을 사네, 무더울 땐 능히 시원한 기운으로 식혀주고, 눈서리에는 새삼 꼿꼿한 자태를 간직하네. 오죽헌에 사는 이의 심사가 일찍이 어떠할지 과객인들 주인에게 굳이 물을 필요 있을까 또 짓다 무엇이 평생을 두고 이 몸 그르칠 수 있으랴. 높고 높은 의기 대단해 견주어 짝할 바가 없네. 가슴 속 자득한 건 본디 자연에 살고픈 정취, 안주를 앞에 차리니 바다와 산의 진귀한 것일세 술동이의 술만은 청주와 탁주를 따지지 않고, 사귐에 옛사람과 새사람에 구별 두지 않네. 창 앞 대숲 바람 소리 들으며 베개 높게 누우니, 희황 시대 살던 옛 분들과 견주어보네 이구령(李龜齡)
  • 번역차운하다 이구령(李龜齡 ?-1592 유유자적 강호에 사는 백발의 노옹에게, 천 줄기 긴 대나무가 바로 그의 이웃일세. 초탈한 왕자유처럼 좋은 벗으로 사귀면서, 늦은 식사라도 달가워 하는 청빈한 삶을 사네, 무더울 땐 능히 시원한 기운으로 식혀주고, 눈서리에는 새삼 꼿꼿한 자태를 간직하네. 오죽헌에 사는 이의 심사가 일찍이 어떠할지 과객인들 주인에게 굳이 물을 필요 있을까 또 짓다 무엇이 평생을 두고 이 몸 그르칠 수 있으랴. 높고 높은 의기 대단해 견주어 짝할 바가 없네. 가슴 속 자득한 건 본디 자연에 살고픈 정취, 안주를 앞에 차리니 바다와 산의 진귀한 것일세 술동이의 술만은 청주와 탁주를 따지지 않고, 사귐에 옛사람과 새사람에 구별 두지 않네. 창 앞 대숲 바람 소리 들으며 베개 높게 누우니, 희황 시대 살던 옛 분들과 견주어보네 이구령(李龜齡)
  • 역주이구령은 문신으로 훗날 조헌의 문인이며 임진왜란 당시 홍천현감으로 재직 중 조헌의 의병군에 들어가 활약하다가 금산 싸움에서 전사한 인물이다. 왕휘지(王徽之)는 자(字)가 자유(子猷)인데, 대나무를 무척 좋아했다. 또한 눈 오는 날 문득 배에 올라 친구인 대안도(戴安道)를 불쑥 찾아 나섰다는 흥취 있는 우정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오죽헌의 주인이 대나무와 이런 교유를 한다는 내용이다.

현판(S22)

현판(S22
  • 원문謹次烏竹軒從祖鳴巖公板上韻 贈權佐郞聖集 洞裏巋然一小亭。 百年巖曲在遺馨。 孟隣樹老人傳里。 孔壁苔緘鬼護經。 時雨玄龍今返海。 霜天烏竹獨留庭。 春風几杖攀何處。 欄外高山立立靑。 運啓吾東出大賢。 淵源直溯洛閩連。 道存宇宙猶撐柱。 世閱滄桑幾變遷。 未覩和風開丈席。 空留霽月掛長天。 始知元氣鍾精處。 磅礴名山與大川。 李鼎輔拜稿
  • 국문종조(從祖) 명암공(鳴巖公)의 오죽헌(烏竹軒) 판상시(板上詩)에 삼가 차운하여 좌랑(佐郞) 권성집(權聖集)에게 주다 마을 안에 우뚝 솟은 작은 정자가 하나 있어 백년토록 이 산 구비에 향기로움이 남겨져 있네. 맹자의 마을 고목에선 사람들이 마을 유래를 전하고 공자의 옛집 담장 이끼 속에선 귀신이 경전을 지키네. 단비 내려서 검은 용이 이제는 바다로 돌아갔는데 서리 내린 가을에 검은 대나무는 홀로 뜰에 남았네. 봄바람이 불면 궤장 들고 어딜 올라볼까 난간 밖 높은 산이 곳곳마다 푸르네. 운이 트여 우리나라에도 위대한 현인이 나셨으니 학문 연원이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에 닿는다네. 도는 우주에 남아 아직도 기둥을 지탱하니 세상은 숱한 세월 겪으며 몇 번이나 변하였던가. 바람과 함께 석을 열지 않았다. 하늘에는 제월이 떠 있고 하늘에는 긴 달이 걸려 있다. 비로소 알겠네. 원기(元氣)의 정수(精髓) 모인 곳이 드넓은 명산과 대천이 있는 여기인 것을. 이정보(李鼎輔 1693-176가 절하고 짓다.
  • 번역종조(從祖) 명암공(鳴巖公)의 오죽헌(烏竹軒) 판상시(板上詩)에 삼가 차운하여 좌랑(佐郞) 권성집(權聖集)에게 주다 마을 안에 우뚝 솟은 작은 정자가 하나 있어 백년토록 이 산 구비에 향기로움이 남겨져 있네. 맹자의 마을 고목에선 사람들이 마을 유래를 전하고 공자의 옛집 담장 이끼 속에선 귀신이 경전을 지키네. 단비 내려서 검은 용이 이제는 바다로 돌아갔는데 서리 내린 가을에 검은 대나무는 홀로 뜰에 남았네. 봄바람이 불면 궤장 들고 어딜 올라볼까 난간 밖 높은 산이 곳곳마다 푸르네. 운이 트여 우리나라에도 위대한 현인이 나셨으니 학문 연원이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에 닿는다네. 도는 우주에 남아 아직도 기둥을 지탱하니 세상은 숱한 세월 겪으며 몇 번이나 변하였던가. 바람과 함께 석을 열지 않았다. 하늘에는 제월이 떠 있고 하늘에는 긴 달이 걸려 있다. 비로소 알겠네. 원기(元氣)의 정수(精髓) 모인 곳이 드넓은 명산과 대천이 있는 여기인 것을. 이정보(李鼎輔 1693-176가 절하고 짓다.
  • 역주명암(鳴巖)은 이해조(李海朝 1660-171의 호이다. 정호(鄭澔)의 「오죽헌중수기(烏竹軒重修記)」에 따르면, 양양(襄陽) 군수였던 이해조가 오죽헌의 중수를 적극 도왔다고 한다. 이 시에서 언급된 맹자가 살던 마을에 남은 고목과 공자의 옛 집에 보존된 경전들은, 『격몽요결』 친필본이 보존되어 있고 검은 대나무가 지금도 남아 있는 오죽헌을 통해 율곡 선생을 떠올리도록 만드는 표현이다. 검은 용은 율곡 이이를 상징한다.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를 낳을 때 검은 용의 출현을 태몽으로 꾸었다 해서 지금도 오죽헌에 몽룡실이 남아 있다. 여기서는 율곡 이이의 죽음을 검은 용이 바다로 돌아갔다고 표현했다. 서리 내리는 계절에도 변하지 않고 의연하게 오죽헌을 지키는 검은 대나무는 이미 세상을 떠난 율곡 선생을 잊지 않고 기억하게 만드는 시각적인 연상물이다. 궤장(几杖)은 노인이 앉아 쉴 수 있는 의자와, 손으로 짚는 지팡이를 가리킨다. 『예기(禮記)』 「곡례」에 따르면, 노인을 모실 때는 궤장을 챙겨 따른다고 했다. 원문은 낙민(洛閩)인데, 중국 송나라의 정자(程子) 즉,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형제와 주자(朱子)를 가리킨다. 이는 정명도와 정이천이 낙양(洛陽) 출신이고, 주자가 민중(閩中 : 福建省) 출신이기 때문이다.

현판(S23)

현판(S23
  • 원문敬題烏竹軒 海嶽精英氣 當年此室鍾 荷珠元活潑 雲日自從容 小閣宸章煥 遺編道氣濃 至今烏竹在 佇看化爲龍 後學 孟至大
  • 국문오죽헌에 공경히 시를 지어 붙이다 해악의 빼어난 기운의 정수가 그 당시에 이 집으로 모여 들었네. 연잎의 이슬은 원래 생기 넘치는데 구름 위의 해는 본디 조용하구나. 작은 누각에 임금님의 글 빛나고 남은 책엔 도의 기운이 짙네. 지금은 검은 대나무 남아 있으니, 변하여 용이 되는 것 기다려 보네. 후학(後學) 맹지대(孟至大 1730-?)
  • 번역오죽헌에 공경히 시를 지어 붙이다 해악의 빼어난 기운의 정수가 그 당시에 이 집으로 모여 들었네. 연잎의 이슬은 원래 생기 넘치는데 구름 위의 해는 본디 조용하구나. 작은 누각에 임금님의 글 빛나고 남은 책엔 도의 기운이 짙네. 지금은 검은 대나무 남아 있으니, 변하여 용이 되는 것 기다려 보네. 후학(後學) 맹지대(孟至大 1730-?)
  • 역주원문인 ‘하주(荷珠)’는 군자가 수양하여 잘 처신함을 비유한 말이다. 중국 당나라 백거이(白居易)의 「하주부(荷珠賦)」에서 연잎의 이슬을 가리켜 “기울어진 곳에는 처하지 않고, 항상 반듯한 곳에 의지하며, 그칠 곳에 그치되 반드시 연잎 한 가운데 위치하고, 둥글 대로 둥글지만 물의 본성을 결코 잃지 않는다.” 한 말에서 유래했다. 원문인 ‘운일(雲日)’은 임금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시에서는 태양이 중천에 조용히 떠 있으나 천지사방 비추지 않는 곳이 없다 하여 임금의 덕화(德化)가 고루 퍼지는 것을 찬미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1788년 정조는 율곡 선생이 어린 시절 쓰던 벼루와 친필로 쓴 『격몽요결』 초고본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듣고, 그 벼루 뒷면에 율곡을 찬양하는 글을 새기고, 책에는 머릿글을 지어 잘 보관하게 했다. 율곡 이이가 친필로 쓴 『격몽요결』 초고본을 가리킨다. 당시 임금의 명을 받은 강원도관찰사 김재찬(金載瓚)이 이 책을 보관할 수 있도록 세운 건물이 바로 오죽헌 옆의 ‘어제각(御製閣)’이다. 본관은 신창(新昌). 거주지는 온양(溫陽). 자는 양여(養汝). 맹사성(孟思誠)의 후손이다. 조부는 충청도관찰사 맹만택(孟萬澤)이고, 부친은 교관을 지낸 맹숙주(孟淑周)이다. 병조참의 및 승지를 거쳐 강릉부사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