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성 건봉사지
- 지정종목 사적
- 지정(등록)일2023.02.28
- 시대고려시대
- 지역강원도 고성군
「고성 건봉사지」는 문헌기록상 6세기경 창건되었으며 만일염불회의 발상지이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불교신앙의 중심도량이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원당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고,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을 일으킨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있으며 ‘고성 건봉사 능파교(보물)’,‘건봉사 불이문(문화유산자료)’ 부도군 등 다수의 문화유산이 현존하고 있다. *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 극락에 오르기 위해 10,000일(약 27년)동안 나무아미타불을 입으로 외우며 기도하는 모임 * 도량: 불도를 닦는 곳 * 원당 : 왕실이 소원을 빌기 위해 세우거나 육성한 불교 사찰 * 승병: 승려들로 조직된 군대로, 승군이라고도 함 「고성 건봉사지」는 1990년 지표조사를 시작으로 2002년부터 2020년까지 9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와 2회에 걸친 학술발표회(세미나)를 통해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한 고려후기 건물지까지 확인되었다. 또한 조선시대에 이르러 능파교를 기준으로 대웅전과 극락전 영역, 낙서암 영역으로 구분되어 각 영역 내에 예불, 승방이 조성되고 이후 적멸보궁 영역이 새로 확장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 통해 「고성 건봉사지」가 일반적인 조선시대 사찰배치에서 보이는 예불공간 중심의 구성이 아닌 예불공간과 승방이 균일하게 구성되어 있는 양식을 보여주었던 고려시대 다원식(多院式) 구조의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각종 역사 기록과 고고학적 발굴성과, 사역 전체에 분포하고 있는 석조유물 등을 종합하여 미루어볼 때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큰 사지로 평가된다. * 능파교: 고성 건봉사의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고 있는 다리,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2002.2.6.지정) * 적멸보궁: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를 모셔놓는 건물 * 다원식 : 건물지가 구역별로 구분되는 형태 * 승방 : 승려들이 거주하는 곳
-
포항 법광사지 삼층석탑
- 지정종목 시도유형문화유산
- 지정(등록)일2023.02.13
- 시대
- 지역경북 포항시
법광사지 삼층석탑은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이다. 이중 기단에 삼층 탑신을 올린 양식으로, 탑신 맨 아래 층의 받침이 굽형 괴임**** 형식으로 변화했다는 점에서 통일신라 석탑 양식이 발달하는 흐름을 보여준다. 조탑경*****이 확인된 석탑들 중에서 『불정존승다라니경佛頂尊勝陀羅尼經』을 조탑경으로 삼은 유일한 석탑이라는 점, 석탑을 만든 기록을 통해 탑을 세운 명확한 연대를 알 수 있어 9세기 석탑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는 기준이 된다는 점 등에서 국가유산적 가치가 크다. * 기단부(基壇部): 건축물의 터를 다듬은 후 바닥에서 한 층 높게 쌓은 부분. ** 탑신부(塔身部): 기단(基壇)과 상륜(相輪) 사이의 탑의 몸체 부분. *** 상륜부(相輪部): 탑의 꼭대기에 있는 원기둥 모양의 장식 부분. **** 굽형 괴임(굽型괴임): 탑신(塔身)의 아래를 받치는 납작한 굽 모양의 굄돌. ***** 조탑경(造塔經): 불탑을 세우는 근거로 삼아 탑 안에 넣는 경전. 원래 불탑이나 불상을 세울 때는 부처의 진신 사리를 넣어 두어야 하는데, 부처의 가르침을 기록한 경전도 부처의 몸과 마찬가지라고 보아 사리 대신 경전을 넣어도 불탑이나 불상을 만들 수 있도록 하였다.
-
순천 선암사 일주문
- 지정종목 보물
- 지정(등록)일2022.12.28
- 시대조선시대
- 지역전남 순천시
「순천 선암사 일주문」이 위치한 선암사는 통일신라시대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신라시대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조계문으로도 불리는 일주문에 대한 기록은 1540년 중창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현 일주문 앞쪽에는 ‘조계산선암사(曹溪山仙巖寺)’라는 현판이 뒤쪽에는 ‘고청량산해천사*(古淸涼山海川寺)’ 현판이 걸려있다. * 1759년 화재 이후 선암사에서 해천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823년 다시 선암사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선암사 일주문은 단칸 맞배지붕과 주상포, 주간포의 다포식 공포로 되어있다. 축부(軸部/ 기둥 부분)는 양팔보(기둥과 창방으로 단순하게 구성된 T자형) 형식으로 되어있으며, 창방(기둥머리에 가로로 맞추는 목재) 전체 배치형식은 ‘口’자형이다. 주기둥 옆에는 흙과 돌을 사용하여 쌓은 뒤에 횟가루로 표면을 마감한 짧은 담장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기둥은 하부에서 상부로 갈수록 직경이 작아지는 민흘림 형식이다. 내부 의장은 특별하게 장치한 것은 없으나 2001년에 주기둥 내측 상부에 용두(龍頭)를 추가 한 것을 들 수 있다. 일주문 내부에 용두로 장엄을 베푼 예는 대구 동화사 일주문과 장흥의 보림사 일주문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 사찰은 천장에서 용두가 내려와 있어 선암사의 용두를 기둥에 거는 방식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순천 선암사 일주문은 초창 모습은 확인할 수 없으나 조선시대 기록을 통해 확인된 중창 이후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의 전화를 피해 유일하게 소실을 면한 건축물로서 조선 중기 건축물의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어 그 역사적ㆍ학술적 가치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일주문 형식에서 양팔보형은 순천 섬암사 일주문과 북한의 안변 보현사 일주문으로 남북한을 통틀어 2개의 사례가 존재한다.
-
경주 (전)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
- 지정종목 보물
- 지정(등록)일2022.11.25
- 시대통일신라시대
- 지역경북 경주시
「경주 (전)염불사지 동ㆍ서 삼층석탑{慶州 (傳)念佛寺地 東‧西 三層石塔}」은 2003년과 2008년에 걸쳐 진행된 발굴조사를 거쳐, 8세기 초반에 창건되어 12세기에 폐사된 사찰로 추정된다. 이 사지에 위치한 동ㆍ서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기인 8세기 전반에 건립된 5.85m 높이의 삼층석탑이다. 두 탑은 모두 상, 하 2층의 기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탑신(塔身, 몸돌)과 옥개석(屋蓋石, 지붕돌)은 각각 1매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륜부는 대부분 사라지고 노반석(露盤石, 탑의 상륜부를 받치는 돌)만 남아 있다. 동탑은 1963년에 불국사역 광장으로 이전되었던 것을 2009년 사지 정비와 함께 원위치에 이전 복원되었으며, 탑지 발굴조사 결과 서탑과의 높이를 맞추기 위해 기초부를 추가로 조성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서탑은 무너져 있었던 것을 발굴조사 결과에 따라 동탑과 함께 원위치에 복원되었으며, 전체적으로 동탑과 동일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두 탑은 복원 과정에서 일부 새로운 부재들이 사용되었으나, 전체적인 조영 기법과 양식, 석탑 기초부에 대한 발굴 조사 결과 등을 고려할 때, 8세기 전반에 건립되어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과 양식사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러한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를 고려할 때 국가지정유산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
-
봉화 청암정
- 지정종목 보물
- 지정(등록)일2022.10.31
- 시대조선시대
- 지역경북 봉화군
"봉화 청암정은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충재길 44에 위치하고 있으며, 안동권씨 충재종택 경역 내에 자리하고 있는 정자로, 인근에 위치한 석천계곡의 석천정(石泉亭) 등과 함께 현재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봉화 청암정은 『충재집(盅齋集)』『석천지(石泉志)』등의 역사 문헌에 따르면, 1526년 충재 권벌(冲齋 權橃, 1478~1548)이 살림집의 서쪽에 건립한 정자이다. 창건 당시에는 마루로 된 6칸 규모의 건물이었으며, 16세기 말에 2칸 규모의 온돌이 추가되었다. 이후 1721년 동측면 기둥 3개를 교체하고, 북쪽 처마와 덧서까래를 고쳤으며, 난간과 기와를 모두 바꾸고 단청을 했다는 내용이 권두경(權斗經)의「선생수서목편식(先生手書木片識)」이라는 기록에 남아 있다. 16세기 사대부들은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개인적인 장수(藏修)와 유식(遊息)을 위한 개인 거처를 집 주변이나 명승지에 정자 형태로 짓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를 가거(家居)라 하였다. 봉화 청암정은 이러한 사대부의 가거적(家居的) 주거문화를 선도한 대표적 사례이며, 안동 권씨 가문과 인근 지역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을 논의하는 회합의 장소로도 사용되는 등 오랜 기간 역사적 자산으로 인식되어 왔다. 청암정은 연못 한가운데 놓인 거북형태의 바위라는 한정된 공간과 바닥의 불균형을 고려하여, 궁궐식의 높은 기단을 세우고, 바닥을 채워 마루와 온돌을 놓았으며, 경상도 일원에 분포하는 ‘丁’자형 평면을 가진 정자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되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또한 창문틀의 중간에 설주를 세우는 고식(古式)의 영쌍창(欞雙窓)이 남아 있으며, 대들보 머리가 주심도리 하단에서 끝나고 익공부재로 외목도리를 지지하는 출목익공의 구성방식은 임진왜란 전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예천 야옹정에서도 확인되는 것으로, 청암정이 17세기 이전의 건축물임을 보여주고 있다."
-
영주 부석사 범종각
- 지정종목 보물
- 지정(등록)일2022.10.31
- 시대조선시대
- 지역경북 영주시
영주 부석사 범종각은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에 위치하고 있으며,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부석사 내에 자리하고 있는 종각으로, 정면 3칸, 측면 4칸 규모의 중층 익공계 팔작지붕 건물의 형식을 가진, 18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종각 건축이다. 영주 부석사 범종각은 『계암일록(溪巖日錄)』, 「부석사기(浮石寺記)」등의 문헌자료에는 ‘종루(鍾樓)’, ‘범종각(梵鐘閣)’ 등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부석사 종각 중수기(浮石寺鐘閣重修記)」에 따르면, ‘범종각’은 1746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이듬해인 1747년에 중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청량산유록(淸涼山遊錄)」에 ‘범종각 내부에 쇠종이 있다’는 기록이 있으나, 19세기 이후 범종의 소재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종각은 보통 사찰의 좌우에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영주 부석사 범종각은 사찰의 진입 중심축선에 위치함과 동시에 아래층은 출입을 겸하고 있다. 특히 정면보다 측면의 칸 수가 많아, 아래층의 가운데 칸은 통로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건물을 계기로 진입축이 엇갈리게 되어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측면이 길며, 정면쪽 지붕은 팔작지붕, 후면쪽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아래층은 모두 기둥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운데 칸에 계단을 두어 안양루로 통하는 누하진입(樓下進入)의 형식을 갖고 있는데, 아래층의 기둥은 바깥면에 위치한 기둥이 안쪽에 위치한 기둥보다 굵다. 위층은 사방이 벽체가 없이 트여 있으며, 내부 바닥 전체가 우물마루로 되어 있고, 내부에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板)을 두고 있다. 공포는 전면과 좌우 측면의 경우 1출목 2익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살미(山彌)의 외부는 앙서(仰舌)형의 초익공과 수서(垂舌)형의 이익공으로 되어 있고, 포와 포 사이에는 화반을 둔 반면, 후면은 간략한 초익공으로 구성하였다. 특히 화반은 파련초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데, 초각 수법은 18세기 중반의 것으로 보인다. 지붕은 후면을 맞배지붕으로 하되 풍판(風板)을 두지 않았으며, 내부에는 범종각 중창 당시의 것으로 판단되는 단청이 남아 있다.
-
영주 부석사 안양루
- 지정종목 보물
- 지정(등록)일2022.10.31
- 시대조선시대
- 지역경북 영주시
영주 부석사 안양루는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에 위치하고 있으며,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부석사 내에 자리하고 있는 문루로, 국보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위치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중층 다포계 팔작지붕의 형식을 가진, 16세기 사찰 문루 건축의 대표적 사례이다. 영주 부석사 안양루는 『계암일록(溪巖日錄)』, 「부석사 안양루 중창기(浮石寺 安養樓 重刱記)」, 「무량수전 안양루 중수기(無量壽殿 安養樓 重修記)」 등의 문헌자료에 의하면, 원래 ‘강운각(羌雲閣)’이라는 단층 건물이 있었으나, 1555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이후 1576년에 중층 문루인 ‘안양루’를 그 자리에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영주 부석사 안양루는 전체 사찰배치에서 사찰의 진입 축(軸)을 꺾어 무량수전 영역에 진입하게 하고 있어, 무량수전 영역의 종교적 경외감과 조망을 극대화 시키고 있다. 아래층은 모두 기둥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운데 칸에 계단을 두어 무량수전으로 통하는 출입문으로 사용하는 누하진입(樓下進入)의 형식으로 되어 있고, 안양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위층은 사방이 벽체가 없이 트여 있으며, 내부 바닥 전체가 우물마루로 되어 있어 강당의 역할을 하고 있다. 공포는 외2출목, 내3출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간포는 주심포 사이에 각 1개씩 배치되어 있다. 공포는 외부와 내부의 모습이 다른데, 외부의 살미는 길이가 짧으면서 끝을 직절한 쇠서형태로 된 반면, 내부는 교두형으로 첨차와 동일한 형태로 처리되어 있고, 첨차에는 조선 중기 이전에 나타나는 공안(拱眼)의 수법이 남아 있다. 또한 대들보 위에는 화반형 동자대공, 첨차, 소로로 구성된 포대공을 놓아 종보를 받치고 있으며, 충량 위에는 복화반 형태 동자주와 화반형 동자주를 직교하여 도리를 받치고 있는데, 이러한 구성은 조선 중기 또는 그 이전에 사용된 오래된 기법으로 알려져 있다.
-
합천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복장유물
- 지정종목 국보
- 지정(등록)일2022.10.26
- 시대신라 9세기 후반
- 지역경상남도 합천군
"‘합천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복장유물’은 원래의 봉안전각은 알 수 없으나 한동안 팔만대장경이 봉안된 법보전의 주불로 봉안되었다가 지금은 주불전인 대적광전의 오른쪽에 위치한 대비로전(大毗盧殿)에 봉안된 불상과 그 복장유물이다. 불상의 제작 시기는 불상의 양식과 도상, 과학적 조사를 토대로 통일신라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이는 해인사가 802년 창건된 사실에 비추어 법보전 비로자나불상이 해인사 창건시기와 크게 멀지 않은 시점에 조성되었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불상으로서 그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점을 말해 준다.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불상이라는 상징성과 더불어 작품의 완성도 측면에서도 매우 뛰어난 조각기법을 보여준다. 지권인(智拳印)의 수인(手印)을 하고 한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偏袒右肩)의 옷차림, 무릎 사이의 부채꼴 모양의 주름, 원만한 얼굴과 당당하고 건장한 신체표현 등은 9세기 석굴암 불상 양식과 유사성을 보여준다. 특히 팽팽한 근육과 자연스럽게 처리된 옷주름에서 느껴지는 긴장감과 탄력감은 신라 전성기 미적 감각과 양식적 특징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이렇듯 법보전 비로자나불좌상은 신라시대 전성기 불상을 연상케 할 만큼 조각적 완성도가 높을 뿐 아니라 중앙에서 활동하던 신라조각가들이 지방의 중요 왕실사찰까지 활동반경을 넓혀 활약한 상황을 유추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이와 더불어 상의 재료가 보기 드물게 향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또한 주목된다. 이는 향나무가 우리나라 목조불상의 대다수가 소나무나 은행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차별되는 양상이다. 해인사 법보전과 대적광전의 목조비로자나불좌상 2구와 고려시대의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이 유일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제작방식을 보면, 불신(佛身)은 하나의 원통형 나무로 만들고 뒷부분에 나무를 덧대었으며, 머리와 팔은 따로 만들어 접목하였다. 나발(螺髮)은 흙으로 별도로 만들어 붙인 점에서 고려시대 이후에 등장하는 접목기법의 시원적 방식을 보여 준다. 불상과 더불어 복장유물 또한 한국불교사, 미술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자료이다. 해인사는 1489∼1490년 동안 조선왕실의 후원을 받은 당대 최고의 고승(高僧) 학조(學祖, 15세기)에 의해 중창되었으며, 복장유물에는 고려∼조선 등 여러 시기 불상의 중수과정에서 추가로 납입된 귀한 전적과 직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1490년 중수 복장유물은 조선 초기 왕실 발원 복장유물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복장에서 나온 후령통은 원래 형태가 완벽하게 보존된 것으로, 16세기 『조상경(造像經)』의 시원이 된 복장 안립 물목의 종류와 안립 절차에 대해 규명하게 된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이러한 복장유물의 물목과 체계를 통해 당시 해인사의 위상과 왕실불사의 수준 그리고 고려∼조선 초기까지 복장 납입 및 불상의 중수 사실 등을 확인할 수 있다."
-
창원 북부리 팽나무
- 지정종목 천연기념물
- 지정(등록)일2022.10.07
- 시대
- 지역경상남도 창원시
팽나무는 우리나라 중남부 지방에 주로 살며 바다와 강이 만나는 포구 주변에 볼 수 있는 나무로 ‘패구나무’라고도 불리었으며 열매는 철새들의 먹잇감을 제공하고 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크게 자라 그늘을 형성하는 대표적인 당산나무이다. 북부리 팽나무는 이러한 생육 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나무로 농경사회에서 오랫동안 동부마을 공동체의 구심점이었고 마을주민들이 팽나무를 신목으로 여겨 당제를 시작해 현재 당선암 까지 당산제를 지속해 온 마을 고유의 전통과 1934년 홍수해 시 마을 주민과 팽나무가 함께 찍힌 사진이 기사화(동아일보 1934.11.24.) 되는 등 마을과 팽나무와의 관계가 확인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학술적 역사적 가치가 있다. 또한 기존에 노거수로 지정된 팽나무 2주와 비교해도 규모 면에서 손색이 없고 수관이 넓게 펼쳐지는 수형이 아름답고 생육상태가 양호하다. 팽나무가 위치한 언덕에서 낙동강을 경계로 북쪽에는 하남읍 남쪽에는 대산면의 넓은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어 기존에 지정된 팽나무의 입지와는 차이가 있는 독특한 경관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
영천 인종대왕 태실
- 지정종목 보물
- 지정(등록)일2022.08.26
- 시대조선시대
- 지역경북 영천시
"「영천 인종대왕 태실」은 조선 왕실이 태를 봉송(奉送)하여 태실에 봉안하는 의례에 따라 1521년(中宗 16)에 처음 설치되었다. 이후 인종이 즉위하면서 1546년(明宗 1)에 가봉(加封)공사가 완료되었으며, 1680년(肅宗 6)에 개수되었고, 1711년(肅宗 37) 태실비에 대한 재건이 이루어졌다. 이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전국에 소재한 54개소의 태실에서 태항아리와 태지석 등을 서삼릉으로 이안하고 석물을 폐기하면서, 영천 인종대왕 태실의 태항아리도 1928년 서삼릉으로 이안되었다. 이후 영천 인종대왕 태실은 방치되었다가 1960∼70년대 매몰된 석재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1999년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다. 이후 2007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정비되었으며, 현재는 태실 1기, 비 1기 및 기타 석물로 이루어져 있다. 「영천 인종대왕 태실」은 위에서 볼 때 8각형의 평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변에 난간석을 두고 중앙에 태가 안치된 승탑(僧塔)형태의 중동석(中童石)이 놓여 있다. 중동석은 연화문(蓮花紋)으로 장식된 네모난 큰 돌 위에 놓여 있으며, 중동석 위에는 두툼한 처마를 지닌 옥개석 형태의 개첨석(蓋檐石)을 얹었다. 개첨석 위에는 연주문(蓮珠紋)이 2단으로 장식된 보주(寶珠)를 올렸다. 중동석 주변으로는 여러 매의 방사형(放射形) 석재를 놓아 8각형의 평면을 구성하고, 바깥 주변으로 석조 난간을 둘렀다. 전면에 위치한 가봉비(加封碑)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인 귀부(龜趺), 비신(碑身) 그리고 이수(螭首)로 이루어져 있다. 비신의 앞면에는 ‘仁宗大王胎室’, 후면에는 ‘嘉靖二十五年五月日建’(1546년)이라고 새겨져 있어, 태실의 주인과 태실비의 건립 시기를 알 수 있다. 「영천 인종대왕 태실」은 설치 과정과 내력을 알 수 있는 관련 기록이 비교적 자세하게 전해지고 있으며, 전체적인 조영기법과 구조 등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의 내용에 부합된다. 또한 태실과 태실비의 전체적인 조영기법이 우수하며, 태실을 구성하는 석물의 세부 치석이나 장식기법이 정연하고, 문양과 조각 기법이 우수하여,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기술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된다. 「영천 인종대왕 태실」은 처음 설치된 이후 원 위치를 유지하고 있으며, 전체적인 구성과 입지 등은 원래의 조영 의도와 가치를 보존하고 있다. 또한 태(胎)를 안치하는 당대의 문화적 전통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현존하는 조선왕실의 태실 가운데 규모가 크고, 국가유산으로서 지녀야할 보편적 가치와 함께, 완전성과 진정성도 구비하고 있어, 국가지정유산으로 승격될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
상주 수암종택
- 지정종목 국가민속문화유산
- 지정(등록)일2022.08.22
- 시대18세기~19세기
- 지역경북 상주시
"⌜상주 수암 종택⌟은 서애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셋째 아들 수암 류진(柳袗, 1582∼1635)을 불천위로 모시는 종가로, 속리산, 팔공산, 일월산의 지맥이 모이고, 낙동강과 위천이 합류하는 ‘삼산이수(三山二水)’의 명당자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ㅁ자형 본채를 중심으로 별동의 녹사청과 사당이 위치하고 있다. 구전에 의하면 류성룡의 수제자인 상주 출신 우복 정경세(鄭經世, 1563~1633)가 집터를 정해주었다고 하며, 실제 우복 종택은 약 32km 떨어져 있다. ⁕ 불천위 : 덕망이 높고, 국가에 큰 공로를 세운 인물을 영원히 사당에 모시도록 국가에서 허가한 신위 본채는 안채와 사랑채가 하나로 연결된 ㅁ자형 건물로, 경북 북부지방의 건축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고, 특히 안채 대청 우측 마루방의 지면을 들어 올려 누마루처럼 꾸민 점은 다른 고택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구조이다. 또한, 안채 대청 상량묵서에서 건립연대(1858년)가 명확하게 남아 있는 등 비교적 원형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녹사청은 본채 전면에 있는 ㄱ자형 건물로, 고종 때 좌의정을 지낸 류후조(1798∼1876)가 1872년 봉조하(奉朝賀)를 제수받은 후 녹봉을 지고 오는 관리들을 맞이하거나 묵게하는 용도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건물이 민가에 남아 있는 것이 희소한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청백리 집안답게 별다른 장식없이 소박하지만 당시 사회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 봉조하(奉朝賀) : 70세 내외 2품관 이상의 퇴직관료에게 특별히 내린 벼슬 ⁕ 봉조하 제수현황 :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정보에서 봉조하 제수 사실이 명확히 확인되는 인물은 68명이며, 평균 연령은 만68.3세 야사⁕에 따르면 파락호 생활을 하던 흥선대원군이 한때 수암 종택에 머물면서 영남지역 인물들을 파악하며 후일을 도모했다고 한다. 종가에서 전해오는 죽병(대나무 병풍)이 당시 흥선대원군이 그려준 것이라고 한다. 흥선대원군 집권 후 남인계 중용책에 따라 류후조는 1864년(고종 1년) 이조참판, 1866년 우의정, 1867년 좌의정에 오르게 된다. * 영남일보 1976. 7. 10. 팔도명인기인전 기사 ⌜상주 수암 종택⌟은 불천위 제사 외에도 기제, 묘제 등 제례문화가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고, 녹패, 간찰, 문집 등 고문헌과 등롱, 가마, 관복 등 민속유물이 다수 남아 있어 19세기 이전 상주지역 상류주택에서의 생활문화를 잘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류진이 남긴 ‘임진록(壬辰錄)’, ‘임자록(壬子錄)’과 흥선대원군과 류후조가 주고 받은 ‘운현간첩(雲峴簡牒)’ 등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조선의 정치ㆍ사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현재 이들 자료들은 상주박물관, 한국국학진흥원, 경북대학교, 연세대학교 등에 기증ㆍ기탁되어 보존되고 있다. * 녹패 : 녹봉을 정해 내려주는 증서 * 간찰 : 안부나 용무를 적어 보내는 글 * 등롱 : 등잔불에 종이나 헝겊을 씌어 달아두거나 들고다니는 기구 * 임진록/임자록 : 임진왜란 피난생활과 무고한 옥살이 경험을 쓴 일기체 기록 한편, ⌜상주 수암 종택⌟에는 류후조와 관련한 재밌는 일화가 전해오는데, 녹봉이 떨어졌을 때 손님이 찾아오면 아무것도 넣지 않고 끓인 백비탕(白沸湯)을 놋그릇에 담아 정성껏 대접하여 손님에 대한 예를 다했다고 한다. 이는 류후조가 벼슬길에 올랐음에도 절조를 지켜 청렴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일화다. 그리고 이러한 기상은 후손에게 이어져 류진의 11대손 류우국(柳佑國, 1895~1928)은 1920년 상해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하였고, 1923년 조선의열단에서 김지섭 등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북경에서 ‘혁명도보’, ‘혈조’와 같은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였다. 1926년 독립운동 자금 조달 차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다가 1928년 급병으로 요절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
경주 옥산서원 무변루
- 지정종목 보물
- 지정(등록)일2022.07.29
- 시대조선시대(16세기)
- 지역경북 경주시
경주 옥산서원 무변루는 『옥산서원기(玉山書院記)』(1574)에서 1572년에 서원 초창 당시부터 누각으로 건립되었으며, 납청루(納淸樓)라 불렸다고 한다. 이후 노수신이 제액을 찬하면서 무변루(無邊樓)로 명칭을 고쳐 지었다. 무변루에 설치된 기와 중에서 1674년(숭정 38), 1782년(건륭 47), 1839년(도광 기해) 명문이 확인되고 있으므로 이때에도 중수하였을 것이고, 이후 1844년에도 중수가 확인된다. 이 외에도 『어제제문(御製祭文)』(1792), 『을사년 옥산서원 통문(乙巳年 玉山書院 通文)』(1905)에 따르면, 토론과 휴식, 모임, 숙식의 공간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타나며, 다양한 시문에서 무변루 기록이 확인된다. 고종 때 훼철되지 않은 사액서원의 문루로 역사적 기록과 함께 잘 보존되어 현재까지 잘 이어지고 있다. 무변루 배치는 서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로 건립되었다. 구조는 5량가이고, 공포는 초익공 양식으로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에다 좌·우 측면에는 홑처마 부섭지붕을 설치하였다. 지붕에 얹은 기와 중 숭정(崇禎)과 건륭(乾隆), 도광(道光)이란 명문이 남아있어 과거 수리 시기를 정확하게 알게 해 준다. 주요 특징을 요약하면, 1572년 초창 이래로 옥산서원 무변루는 위치 변동이 없이 그 자리에 지속되어 왔다는 점과 초창 시 경상도 유림이 힘을 모아 건립하고 그 이후에도 중건 중수를 지속하여 왔다는 점, 유생들의 교육기관으로서뿐만 아니라 문화창달과 지식보급에 큰 역할을 하여 왔다는 점, 무변루의 중수 연대를 명확히 알게 해주는 3종류의 명문기와가 존재한다는 점, 비 훼철 사액서원 중 삼문과 방, 대청, 누마루, 고상식 아궁이를 두고 있는 아주 드문 문루라는 점, 상층에 고상식 온돌방을 설치하여 기숙을 겸하는 점, 양 측면에 부섭지붕을 달아낸 누마루를 설치하여 주변의 자연경관 조망을 무변루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 등이다. 이러한 두드러진 특징으로 인해 경주 옥산서원 무변루는 비 훼철 사액서원의 초기 문루로서 역사적, 건축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므로 국가지정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
-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 지정종목 국보
- 지정(등록)일2022.06.23
- 시대1346년(충목왕 2)
- 지역충청남도 청양군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으나, 이후 발원문을 포함한 복장유물이 추가로 연구됨에 따라 제작시기와 발원자 등을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가치가 인정되어 2022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발원문에는 1346년(고려 충목왕 2)이라는 정확한 제작시기가 있어, 고려 후기 불상 연구의 절대 기준을 제시해주고 있다. 고려 후기 불상조각 중 정확한 약기인(藥器印)을 취하고 있는 약사여래의 도상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머리와 이목구비, 신체와 불신의 표현 등에서 14세기 불상의 전형 양식을 간직하고 있으며, 이 시기 불상 중에서도 뛰어난 예술적 조형성을 지니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주조기술법에 있어서도 내외부의 주조결함이 거의 없을 정도로 높은 기술적 완성도를 보여 주는 점도 높이 평가된다. 일반적으로 고려 후기에 제작된 불상은 대부분 아미타 정토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이 불상 역시 이러한 신앙적 배경과 더불어 고려 후기 유일의 금동약사여래상이라는 점에서 크게 주목된다. 따라서 이 불상을 통해 당시 아미타정토 신앙뿐만 아니라 약사 신앙의 흔적을 분명하게 알려 준다는 점에서 신앙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장곡사 불상의 지정가치를 검토하는데 있어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으로 불상이 보여주는 조형적·도상적 중요성 뿐 아니라 복장발원문에 기재된 풍부한 인명정보를 들 수 있다. 장곡사 불상 복장에는 약1,116명에 달하는 발원자의 정보를 담고 있다. 1천명이 넘는 발원자의 등장은 고려 후기 발원문 중 최대 규모일 뿐만 아니라 이들 시주자 인명에 대한 분석을 통해 문헌 자료가 절대 부족한 고려사 복원에 중요한 사료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장점을 지니고 있다. 특히 성불원문을 지은 백운(白雲)은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 『불설직지심체요절』을 편찬한 백운경한(白雲景閑, 1298∼1374)과 동일인물로 추정되고, 그는 고려 후기 나옹혜근(懶翁慧懃, 1320∼1376),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와 함께 고려 말 ‘삼사(三師)’로 추앙받았던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하는 기록이 부족하여 그의 행적과 불교사적 연구는 미진하였다. 그러나 이 성불원문이 확인됨에 따라 공민왕 이전의 그의 구체적인 신앙 활동을 엿볼 수 있어 그의 생애 연구에도 활력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 장곡사 불상의 제작을 주도한 계층은 고려 왕족을 비롯해 하급무관과 군부인들로 보이며, 이들은 몽고침탈기 동안 대표적인 불사(佛事) 주도층이었다. 아마도 이들은 본인이나 가족 중에 전쟁에 직접 참전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불사를 통해 자신과 가족의 무병장수와 전쟁 중에 죽은 친족의 극락왕생을 발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명 중에는 공민왕의 몽고식 이름인 바얀테무르(伯顔帖木兒)를 비롯해 금타이지(金朶兒只), 도르지(都兒赤)처럼 몽고식 이름이 눈에 띠는데, 당시 고려 사회에 스며든 몽고 풍속의 실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는 역사의 기록 속에서 찾을 수 없는 14세기 중엽 경의 시대상을 꾸밈없이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적‧학술적 의의를 지닌다. 이러한 정황 등을 종합해 볼 때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은 미술사 뿐 아니라 불교사, 사회사적 측면에서도 고려 14세기 중반의 역사상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발원문 및 조성에 참여한 시주자가 기록된 묵서가 있는 직물편, 그리고 공예적 수준이 뛰어난 향낭(香囊)과 함께 국보로 가치가 충분하다."
-
청자 사자형뚜껑 향로
- 지정종목 보물
- 지정(등록)일2022.04.26
- 시대고려시대
- 지역충청남도 태안군
‘청자 사자형뚜껑 향로’는 사자형상을 한 뚜껑과 네 굽이 달린 받침으로 구성된 고려시대 향로로서, 각각 2점씩 한 세트를 이루며 모두 4점이다. 이 유물들은 2007~2008년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 발견된 ‘태안선’에서 출수(出水)되었다. 태안선은 같이 인양된 ‘탐진(耽津)’, ‘최대경(崔大卿)’과 같은 목간을 통해 12세기 전반 강진에서 제작한 청자를 싣고 개경으로 가던 중 침몰한 선박이다. 이 선박에서는 약 25,000여점의 청자 및 여러 유물들이 출수되었으며, 지정 대상 ‘청자 사자형뚜껑 향로’ 역시 그 중 일부이다. 이 청자향로는 원형의 동체에 사자형 장식을 단 뚜껑이 세트를 이루고 있다. 향로뚜껑 위에 올려져 있는 사자는 앞다리를 세우고 위를 향해 치켜세워진 꼬리가 특징이다. 목에는 방울이 달려 있으며, 앞다리와 뒷다리 사이에는 보주(寶珠)를 끼고 있다. 전체적으로 몸통에 비해 사자의 얼굴이 큰 편이며 양옆으로 활짝 벌린 입, 이빨, 혓바닥 등이 세밀하게 표현되었고, 뒷면은 갈기가 그려져 투박하지만 사자의 형상을 모두 갖추고 있다. 다소 파격적이고 거칠게 표현된 사자의 형상은 고려청자에서 볼 수 없는 이례적인 모습이며, 고려인들의 또 다른 미적 취향을 보여주는 희귀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도자기를 굽는 과정에서 몸통 일부가 정제되지 못했으나, 이는 상형청자의 제작방법이 그만큼 어렵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또 하나의 증거이자, 1124년『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설명된 유물로서 당시 고려청자가 중국 청자와의 대외교류를 통해 고유성을 확보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청자 사자형뚜껑 향로’는 제작사례가 많지 않는 희귀한 상형청자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발견 시기와 장소가 명확하고 투박한 표현으로 해학적인 조형미를 보여주는 매우 독특한 유물이다. 고려시대 청자 제작의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
영동 영국사 목조소대
- 지정종목 시도유형문화유산
- 지정(등록)일2022.03.25
- 시대조선시대
- 지역충북 영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