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윤선도가 54세때인 인조 18년(1640)에 머무르며 『금쇄동기』를 비롯한 여러 문헌들을 집필한 곳인 금쇄동과 금쇄동 안에 위치한 현산고성이다.
윤선도는 8살되던 해에 큰아버지에게 입양되어 해남으로 내려가 살았다. 20세에 승보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1616년 성균관유생으로서 집권세력을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함경도로 유배되었다. 벼슬을 버리고 내려온 후에는 조상이 물려준 엄청난 재산으로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찾은 금쇄동에 여러 정자와 각을 지어놓고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
금쇄동은 윤선도가 원림(園林)을 조성한 고성(古城)안과 『금쇄동기』에서 명명한 22개의 지명 등이 있으며, 윤선도가 문학적 영감을 얻기 위해 인위적으로 개척한 문학산책로로서 건물지와 연못지의 유구가 남아 있고, 금쇄동내에 위치한 현산고성(懸山古城)은 고려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동문, 서문, 북문 등 3곳의 문지, 수구의 성곽시설과 망루지, 건물지, 제방 등의 성내시설이 남아 있다
이곳은 고산 윤선도의 시문학 창작의 산실로서 국문학상의 학술적인 가치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옛성이 잘 남아 있어 문화유산적 가치가 매우 큰 유적이다.
-
사적
-
지정(등록일)
2001.08.17
해남 윤선도 유적
-
지정종목
사적
-
수량/면적
149402
-
지정면적
-
보호구역
-
건립연대/시대
조선시대 후기
-
소유자(소유단체)
해남군, 해남윤씨 고산공파 종중
-
관리자(관리단체)
해남군
-
통합 분류
유적건조물 /유물산포지유적산포지 /육상유물산포지 /역사유물
국가유산 설명
연혁
| 구분 | 내용 | 비고 |
|---|---|---|
| 1642 (인조 18년) | 조선 인조 때 정치가이며 문장가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가 1642년(인조 18) 고향으로 돌아와 해남 금쇄동과 수정동의 첩첩산중에 머물면서 자연 속에 인공적인 조형공간으로 원림을 조성하였는데 이들 유적은 그 터를 남김 | |
| 2001 | 국가지정문화재 신규지정 | |
| 2004 | 안채 연목이상 해체보수, 협문 보수 | |
| 2005 | 발굴지 유구에 대한 보호 조치 | |
| 2005 | 금쇄동 사랑채 및 행랑채 보수, 주변 석축 및 담장 공사 | |
| 2011 | 문화재명 변경(해남윤선도유적→해남 윤선도 유적) | |
| 2014~2015 | 발굴조사 | |
| 2018 | 발굴지 정비 |
사업 이력 5건
| 사업유형 | 사업명 | 연도 | 사업주체 | 사업수행 | 상세보기 |
|---|---|---|---|---|---|
| 기타 | 2010년 문화재대관 사적편(증보) 제2권 | 2010 | 문화재청 보존정책과 | 문화재청 보존정책과 | |
| 조사연구 | 2012년 사적정기조사 | 2012 | 문화재청 보존정책과 | 사단법인 호연건축문화유산연구원 | |
| 조사연구 | 2017년 사적정기조사 | 2017 | 문화재청 보존정책과 | 사단법인 우리문화유산연구원 | |
| DB 구축 | 2022년 문화유산 원형기록 통합DB 구축 | 2022 | 문화재청 정보화담당관 | 엔디에스컨소시엄 | |
| DB구축 | 2025년 국가유산 원형 정보자원 통합DB 구축 | 2025 | 국가유산청 | 엔디에스 컨소시엄 |